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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관심/영화

[영화/드라마] 방자전(2010)

by 오후 세 시 2010. 7. 30.


방자전
감독 김대우 (2010 / 한국)
출연 김주혁,류승범,조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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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 원작을 토대로 한 작품들에 대한 단평

 우리는 '원작의 영화화'라든가 '텍스트의 영상화'라는 말을 곧잘 사용하곤 한다. 그런데 이런 말들은 원작의 반영도를 영화 감상이나 영화 평가의 중요한 항목으로 끼워넣고 있기 때문에 '영화가 원작을 얼마나 잘 반영하고 있는가' 따위의 질문들을 매우 긴요하게 취급하도록 만들곤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영화는 원작 텍스트를 영상으로 표현해 내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즉, '원작의 해석 상태'는 주변부로 물러나고 '원작의 보존 상태'가 전면부로 나서게 되는 것이다. 다수의 관객들은 감독에게 '원작 텍스트를 바라보는 객관적인 안목'과 '전형적인 카피 능력'을 요구한다. 이는 관객들이 원작 그대로의 느낌을 영화를 통해 고스란히 전달받기를 원한다는 말로 대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하나의 작품이다. 소설을 원작으로 두고 있는 영화든, 만화를 원작으로 두고 있는 영화든, 혹 이전 영화를 리메이크한 영화든, 모두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개별 작품으로서의 자격을 부여받은 한 편의 영화는 그 자체로서 작품성을 평가받는 것이 옳다. 예전에 <100권의 금서>에 관한 포스트를 작성하며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작품 바깥의 것들-여기에서는 원작의 반영도-은 차후의 문제이다. 작품 바깥의 것들은 작품을 평가하는 데 주변 요소들로서만 작용해야지, 그 중심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원작을 토대로 하는 영화를 감상하고 평가할 때의 기준은 '원작의 해석 상태'로 집중되어야 한다. 얼마나 원작을 잘 복원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원작을 잘 해석해냈느냐가 영화의 감상 포인트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 서면 영화는 비로소 하나의 수단이 아닌, 한 편의 작품이 된다. 그리고 바로 이런 환경이 조성될 때, 관객들은 감독에게 '원작을 바라보는 비평적 안목'과 '창의적인 재창작 능력'을 요구하게 된다.

 이런 식의 논의를 진행시켜 가다 보면, 원작을 지닌 영화를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 번째, 원작에 대한 해석과 원작의 보존 상태가 모두 좋은 영화. 두 번째, 원작에 대한 해석은 좋으나 원작의 보존 상태가 좋지 못한 영화. 세 번째, 원작에 대한 해석은 좋지 못하고 원작의 보존 상태만 좋은 영화. 네 번째, 원작에 대한 해석과 보존 상태가 모두 좋지 못한 영화. 개인적인 기준에 따르면 첫 번째 유형이 가장 좋고, 두 번째가 다음으로 좋으며, 세 번째는 별로 좋지 못하고, 네 번째는 가장 좋지 못하다. 원작을 바탕으로 두면서 첫 번째 유형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감독은 '비평적 안목'과 '창의적 재창작 능력'을 두루 갖췄다고 볼 수 있고, 두 번째 유형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감독은 '비평적 안목'만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세 번째 유형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감독은 '객관적인 안목'과 '전형적인 카피 능력'을 지닌 필사가(筆寫家) 정도에 머무른다고 볼 수 있고, 네 번째 유형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감독은 '객관적인 안목'만을 지니고 있거나 그 마저도 지니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2. 판소리 소설 <춘향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판소리 소설 <춘향전>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영화가 <방자전>이다. <방자전>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판소리 소설 <춘향전>에 대한 이야기가 선행되어야 할 듯하다. 그러니 판소리 소설 <춘향전>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 보자. 판소리 소설 <춘향전>은 몽룡을 기다리며 죽음 앞에서도 정절을 지킨 성춘향과 양반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신분 질서에 저항하며 기생의 딸인 춘향과 언약을 지킨 이몽룡의 감동적인 사랑 이야기이다. 그러나 <춘향전>을 단순히 춘향과 몽룡의 사랑 이야기로만 치부한다면 큰 오산이다. <춘향전>에는 당시 주독자층이었던 조선 후기 백성들의 소망이 간절히 담겨 있고, 부패한 조선 후기 사회에 대한 백성들의 날 선 비판이 통렬하게 표현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사고방식들도 소설 곳곳에 반영되어 있다. 춘향이 몽룡을 기다리며 수절하는 것과 몽룡이 입신양명하여 춘향과의 언약을 지키는 것에는 남녀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잘 나타나 있다. 양반인 몽룡과 기생의 딸인 춘향이 행복한 결말에 이르는 데에는 신분 질서에 대한 민중들의 소망이 담겨져 있다. 반면, 방자와 향단이라는 인물을 통해서는 지배계급에 순종하는 피지배계급의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방자와 향단이가 당시 민중들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면 몽룡과 춘향의 해피엔딩은 당시 민중들의 '바람'을 담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악역으로 등장하는 변학도는 부패한 탐관오리의 전형을 보여준다. 변학도의 몰락 과정에는 심각한 폭정에 대한 민중들의 비판 의식이 풍자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변학도 앞에서 몽룡이 허름한 거지 행색으로 읊는 '金樽美酒는 千人血이요(금술잔에 아름다운 술은 만 백성의 피요) 玉盤佳肴는 萬姓膏라(옥쟁반에 아름다운 안주는 만 백성의 기름이라) 燭淚落時 民淚落하고(촛농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지고) 歌聲高處 怨聲高라(노래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 높더라)'라는 어사출도시는 그런 비판 의식을 나타낸 표현들 중 백미로 꼽을 만하다.


3. 영화 <방자전>

 그럼 이제 <방자전>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자. 판소리 소설 <춘향전>에 등장했던 여러 인물들이 <방자전>에서는 독특하게 재해석된다. 몽룡은 머리는 똑똑하나 여자를 희롱하며 방탕하게 노는 것을 즐기는 인물이고, 춘향은 남원의 최고 가는 절세가인이지만 양반집 도령 하나 제대로 물어 남은 인생을 편안히 보내보고자 하는 속물적인 인물이다. 방자는 기운 세고 과묵한 남자 중의 남자이나 사랑 앞에서는 한없이 연약해지는 순정적 인물이다. <방자전>에서는 <춘향전>에서와는 달리 몽룡과 춘향 사이에 방자를 끼워넣어 삼각관계를 구상해 낸다. 이에 향단이까지 포함시키면 사각관계까지 그 폭을 넓힐 수 있겠지만, 향단이는 <방자전>에서조차 주변 인물에 그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확대시킬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쨌든, 이 삼각관계의 판세는 다음과 같이 짜여진다. 몽룡은 시쳇말로 표현하자면 몇 번 데리고 놀다 버릴 셈으로 춘향에게 접근하고 춘향은 한탕 잡아보자는 목적으로 몽룡의 접근을 반긴다. 몽룡의 몸종인 방자는 이 두 사람의 첫만남에서 괴력을 과시하며 춘향의 눈에 띠게 되는데 방자와 춘향 두 사람은 그 사건 하나로 첫눈에 사랑에 빠지고 만다. 몽룡과 춘향은 각각의 목적에 따라 짝 지워지고, 방자와 춘향은 사랑에 의해 엮어지게 되는 셈이다. 흔히 알고 있는 삼각관계와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몽룡만 잡는다면 여생이 편안할 것이라 믿는 춘향이의 생각과는 달리, 몽룡은 춘향을 끝까지 책임질 생각이 없다는 점이다. 여기에 중요한 한 인물을 더 추가한다면, 변학도를 들 수가 있겠다. <방자전>에서의 변학도는 어리숙하고 소심하지만, 그런 표면적인 자조감 때문인지 가학성과 변태성을 겸비한, 괴이한 성적 코드를 지닌 인물로 그려진다. 여하튼 이들이 보여주는 삼각 구도 속의 애정극은 판소리 소설 <춘향전>이 조선 후기 사회의 시대상을 보여주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현대의 사회상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춘향은 제 앞가림은 변변치 않으면서 재력 좋고 능력 좋은 남자 만나 인생 한 번 펴보자는 한탕주의와 속물근성에 빠진 현대 여성들의 모습을, 몽룡과 변학도는 미모지상주의에 빠져서 야동과 음담패설 등으로 낄낄거리며 나이트나 클럽에서 원나잇 상대나 물색해 성적 욕구를 해결하려 드는 현대 남성들의 모습을 비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의 전반적인 문화 자체가 젊은이들을 자꾸만 그 지경으로 몰아넣고 있음을 월매와 궁중 내시 등을 통해서도 보여주고 있다. 반면, 현대 사회의 찌그러진 단면을 우스꽝스럽게 그려내면서도, 손발이 오그라든다며 자꾸만 폄하시키고 있는 '진정성'에 대한 바람을 방자의 '진정한 사랑'을 통해 슬며시 끼워넣고 있기도 하다. 판소리 소설 <춘향전>에 대한 현대적 해석을 <방자전>이라고 보는 데는 무리가 없을 듯하다. 영화의 서사 자체가 원작을 훼손시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않다. 영화 후반부에 원작의 서사를 훼손시키지 않으려는 감독의 배려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배려가 조금은 생뚱맞게 보일 수 있다는 단점이 있지만 고전에 대한 감독의 마음이라고 생각한다면 비난할 정도의 단점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4. 나오며

 앞서 원작 텍스트가 있는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했었다. 나는 <방자전>이 야하고 유쾌한 영화로만 읽히는 게 싫다. <방자전>은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를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비꼬고 있고, 현대 사회에 들끓는 욕망들에 대해 가볍지만은 않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방자전>이 판소리 소설 <춘향전>을 코미디로 패러디하지 않고 현대의 시각에서 매력적으로 리메이크할 수 있었던 것은 원작 텍스트인 소설 <춘향전>을 바라보는 감독의 비평적인 안목과 탁월한 재창작 능력이 훌륭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방자전>의 마지막 장면에는 판소리 소설 <춘향전>의 원본을 해치지 않으려는 감독의 노련함이 잘 묻어나온다. 고전에 대한 해석과 그 해석을 현대에 적용시키는 방법이 <방자전>이라는 좋은 영화를 견인했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훌륭한 고전 원작을 훼손시키지 않으려 하는 감독의 마음 씀씀이도 참 인상 깊었다. 야하기도 했고 유쾌하기도 했지만 한편 우울하게도 보였던 영화 <방자전>에 대한 생각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