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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관심/영화

[영화/SF스릴러] 스플라이스(Splice, 2010)

by 오후 세 시 2010. 6. 28.

스플라이스
감독 빈센조 나탈리 (2009 / 캐나다,프랑스,미국)
출연 애드리안 브로디,사라 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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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스플라이스(Splice)
감독 : 빈센조 나탈리
출연 : 애드리안 브로디(클리브), 사라 폴리(엘사), 델핀 샤네끄(드렌)
장르 : SF 스릴러
개봉 : 2010 7월 1일



 종로 광화문 근처 시네마루(미로스페이스)에서 진행된 스플라이스 시사회에 다녀왔다. 빈센조 나탈리 감독의 무대 인사와 상영 전 이벤트(감독의 사인이 들어간 영화 포스터 5장과 티셔츠 5장을, 추첨으로 뽑힌 시사회 관객 10명에게 선물하는 이벤트)로 영화는 조금 늦게 시작되었다. 영화가 끝난 뒤에는 감독과 관객 사이의 대화가 오고 갔다. 관객들은 여러 가지 질문들을 던졌고 빈센조 나탈리 감독은 그에 대해 성의 있고 위트 있는 답변들을 건넸다. 몇 가지 기억에 남는 질문과 답변들을 떠올려 보면 다음과 같다. (기억력 속에 있는 것을 끄집어 재구성한 것이므로 정확한 대화 내용이라고 보긴 힘들다. 그러나 거의 아래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관객 : '신의 영역에 대한 인간의 도전이 가능하다고 보는가?'
감독 : '신이 있다는 가정 하에 얘기하자면, 인간은 신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을 것이라고 본다'
관객 : '여성 드렌은 예뻤는데, 남성 드렌은 어째서 그렇지가 않은가?'
감독 : '남성 드렌이 여성 드렌처럼 아름답지 못한 까닭은, 내가 남성이기 때문이다. (웃으며) 남성에 대한 네거티브가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관객 : '마지막 결말은 후속편을 염두에 둔 것인가?'
감독 : '후속편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해당 캐릭터에게 가장 어울리는 결말로 영화를 마무리하다보니 그런 엔딩에 다다른 것이라고 봐주면 좋겠다. 스플라이스는 스플라이스 한 편로서 하나의 작품이다.'
관객 : '10년 가까이 이 프로젝트를 꾸준히 끌고 올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감독 : '상상해 놓은 것들을 영상으로 펼쳐보이고 싶다는 감독으로서의 욕망이 커다랗게 작용했기 때문인 것 같다. (웃으며) 개인적으로 인간과 크리쳐 간의 (아무래도 애정이 동반된) 섹스 장면을 반드시 영상으로 한 번 만들어 보고 싶었다.'
관객 : '이 영화를 통해 감독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감독 : '(웃으며 농담) 집에서 이런 짓 하지 말라는 거다. 물론 나에게는 이 영화를 통해 전하고 싶은 어떤 메시지가 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관객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아니겠나. 영화는 다양한 것들을 지니고 있다. 이 영화를 보게 될 여러 명의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다양한 메시지를 떠올릴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이제 관객의 몫이다.'
관객 : '나는 이 영화를 자손번식이나 인간의 생장 과정 등과 같은 생식과정의 측면에서 바라보았다. 감독은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감독 : '나도 그 부분을 중요하게 보았다. 인간과 크리쳐 간의 섹스 장면이나 크리쳐가 성장하는 과정 등이 영화에서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크리쳐의 심리, 혹은 인간의 심리에 대한 것이다.'

빈센조 나탈리 감독은 관객의 질문을 들을 때, 진지하게 귀 기울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또 답변을 건넬 때에는 연신 미소를 지었으며, 때로는 몸을 뒤로 젖혀가며 호탕하게 웃어보이기도 했다. 나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과 거부 반응이 동시에 들었다. 빈센조 나탈리 감독은 관객 시사회에 오기 전, 언론 시사회 및 기자 간담회에서 이 영화가 "한국 뿐 아니라 어디에서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컨셉트"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마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컨셉트가 작용한 탓이 커서 내가 영화에 그토록 힘들어 했나 보다. 시사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함께 간 친구와 나는 이 영화의 전망이 밝지 못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러나 지금 다시 그 영화를 찬찬히 떠올려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을 것 같다. 다만 좋고 나쁨의 명암이 심하게 갈릴 것 같기는 하다. 


 이 영화는 괴물 혹은 괴수 영화는 분명히 아니다. 괴물이 나와서 앞뒤 없이 파괴와 살인을 일삼는 그런 영화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 영화 속의 괴물(곧 크리쳐)인 드렌이 인간에 가까운 지성을 지니고 사고한다는 것은 프랑켄슈타인과 유사한 점이라고 볼 수 있다. 빈센조 나탈리 감독도 이에 대해 '프랑켄슈타인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면, <스플라이스>는 어머니와 딸의 관계'라며, 드렌이 여성적 프랑켄슈타인임을 시사했다. 그러나 드렌은 프랑켄슈타인보다 조금 더 인간적이다. 프랑켄슈타인이 인간의 성장 단계 중 일정 단계 상태로 탄생된 반면, 드렌은 아기로 태어나 성장의 과정을 거치고 그 과정에서 인간의 관계에 대해 배우며 인간의 언어를 학습하고 인간의 감정에 대해서 알아가기 때문이다. 인간이 아니면서도 인간에 극도로 가까운 새로운 생물종, 드렌. 그녀(도저히 그 암컷이라고는 말할 수가 없다)는 인간이 아니면서도 거의 인간에 가깝기에 '무섭도록 아름답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억압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헛간에 갇혀서 슬픈 울음을 우는 아름다운 괴물, 드렌. 인간의 필요에 의해 새롭게 창조된 그녀를 우리는 무어라 불러야 좋을까.


 인간과 여러 생물의 유전자를 뒤섞어 만들어 낸 새로운 생물종으로서의 드렌은 애초에 인간의 필요에 의해 계획되고 창조되었는데, 이는 인간의 탄생이 탄생된 인간을 위한 것이라는 점과는 상반된다. 드렌의 탄생은 드렌 그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인간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갓난아이는 출생과 동시에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아이를 둘러싼 환경은 그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할 때까지 그 아이를 보호한다. 그러나 드렌은 그렇지가 않았다. 드렌에게 드렌의 삶은 없었다. 또한 드렌을 둘러싼 환경은 보호라는 명목 하에 드렌을 소외와 단절의 공간으로 밀어넣었다. 인간의 이기심이 못된 것은 모든 가치의 중심을 인간에게 둔다는 점이다. 인간이 인간이란 기준을 모든 가치의 중심에 둬야 한다는 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에 가까운 지성을 지니고 있는 드렌을 보자. 우리와 조금 다르기 때문에 자유를 결박당하고 살아가는, 내내 갇혀서 어린 아이처럼 울고 있는, 인간의 필요에 의해 태어나 인간의 만족을 위해 길러지고 인간의 안전을 위해 폐기당하는, 그리고 다시 인간을 위해 잉태되는 저 나약한 드렌을. 그 인간의 기준이라는 것은 과연 합당한 것인가? 모든 현상을 자신의 식대로 해석하는 인간은 이기심 투성이다. 인간의 이기심은 모든 현상의 가치를 인간에게 두기 때문에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을 별로 즐기지 않는다. 자기의 해석 외의 다른 해석은 용납하지 않는 인간의 이기심은, 그래서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채로 축축한 혀만을 이리 저리 놀려댄다. 인간의 이기심에 조금 더 합리적인 기준이 적용된다면, 세계와 우주는 조금 더 나아질 수 있을까. 나는 왠지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인간의 이기심은 그걸 별로 달가워할 것 같지 않다.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는 인간의 모습은 아름답다. 그러나 빈센조 나탈리 감독의 말마따나 '생명을 창조하는 것보다는 그 이후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더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것이다. 드렌은 인간인 엘사가 일궈낸 세계와 우주의 새로운 영역이었다. 그러나 그 새롭게 창조해 낸 영역에 대해 인간 엘사는 책임보다는 욕망을 앞세웠다. 엘사가 무턱대고 드렌을 창조해 내 키우는 모습, 커 가는 드렌에게 피조물로서의 사랑을 강요하는 모습, 때때로 반항하려 드는 드렌을 자신의 취향에 맞게 변화시키려 하는 모습들은 무책임한 엘사의 욕망을 잘 보여준다. 드렌은 엘사의 이기심과 욕망으로 인해 이 세계에 발디딜 수 있었고, 엘사는 그런 드렌에게 최대한 책임감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엘사도 알고 있었다시피 드렌은 인간에 가까운 지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야기를 유연히 이어나가기 위해 잠깐 샛길로 새서 다른 이야기를 해 보자. 인간의 지성을 단순화시켜서 말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지만, 그것이 자아를 인식하고 자아의 존재에 대해 끊임없는 탐구를 지속하는 인간만의 고유한 본유 성질이라는 점에서는 인격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듯하다. 드렌이 인간에 가까운 지성을 지니고 있다는 건 드렌에게도 격(格)이라는 게 있다는 말이 된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좀 우습지만 그걸 드렌격(dren格)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돌아와서, 엘사는 드렌에게 책임감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엘사는 드렌이 지닌 인간적 지성을 뒤틀어서 받아들였다. 바로 그 측면에서, 클라이브가 엘사에게 드렌을 마치 애완동물을 대하는 것 같다고 이야기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엘사와 드렌의 관계는 이후에 마치 어머니와 딸의 관계로 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실험자와 피험물의 관계 혹은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라는 보이지 않는 끈은 암묵적으로 그 둘 사이에 질긴 고무줄처럼 이어져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점, 엘사와 드렌의 관계가 실험자와 피험물의 관계이며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라는 자(者)와 물(物)의 이질적 관계 구조는 엘사가 드렌의 인간적 지성을 뒤틀어 받아들이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엘사가 드렌을 숨기고 보호하는 것으로 드렌에 대한 책임을 다하려 하는데, 그것이 드렌에게는 감금당하고 자유를 억압당하는 것으로 느껴진다는 것이 결정적인 증거라고 볼 수 있다. 엘사는 드렌을 자식처럼 대하려고 했지만, 드렌의 인간적 지성 즉 드렌이 지닌 격(格)만은 도외시함으로써, 책임으로 가장한 무책임한 욕망만을 드렌에게 쏟아부은 꼴이 되어 버렸다. 엘사는 늘 엘사의 기준에서만 생각했던 것이다. 엘사는 자신의 피조물에 대해 책임을 다했다고 말할 수 없다.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화려하게 꾸민 선물상자의 겉포장지 안에 무시무시한 욕망을 은밀히 숨겨두었기 때문이다. 그 선물상자를 '이기심'이나 '무책임'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리라.


 토끼를 잡아 먹고 입가에 피칠을 한 채 해맑게 웃던 드렌을 떠올려 본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안심하던 클라이브와 엘사의 모습도. 그들은 불안정했지만, 한때는 그렇게 행복했다. 클라이브와 엘사가 떠난 뒤 홀로 헛간에 남아 그리운 클라이브와 엘사의 얼굴을 가만히 그려보던 외로운 드렌의 모습도 상상해 본다. 드렌과 클라이브가 헛간에서 뒤엉켜 있던 모습도 떠올려 본다. 엘사가 그것에 분노하던 모습도. 돌이켜 보니 드렌은 웃기 위해 많이 노력했던 것 같다. 그러나 과거 몇 번의 행복들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었다. 결말은 참담했고 행복했던 과거는 다시 돌아올 수 없었다. 모든 건 인간의 이기심과 무책임이 빚어낸 결과였다.

 어쩌면 드렌은 그냥 태어나지 않는 편이 가장 행복하지 않았을까? 사랑하지 않았다면 헤어지지도 않았을 거고, 처음부터 몰랐다면 사랑하지도 않았을 거라는, 실연당한 누군가의 읊조림처럼.

<모든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