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더미/내가 읽은 책

[책/SF판타지] <유령여단The Ghost Brigades> - 존 스칼지John Scalzi

by 오후 세 시 2011. 6. 2.

유령여단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 판타지소설
지은이 존 스칼지 (샘터, 2010년)
상세보기

 

  존 스칼지John Scalzi의 소설 <유령여단The Ghost Brigades>은 광활한 우주에서 인간의 우주개척연맹과 르레이, 에네샤, 오빈 종족이 벌이는 행성 개척 전투와 그 전투에 얽힌 종족 간의 정치적 투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소설은 SF 판타지라는 장르답게 까마득한 미래에서나 사용할 법한, 다수의 초과학적 산물들을 무더기로 쏟아낸다. 이미 동일 작가의 <노인의 전쟁Old Man's War>이라는 소설을 읽은 독자라면 그리 생소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이 소설을 처음 읽는 독자들이라면 홍수처럼 범람하는 과학적 소재들에 열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그런 흥미본위의 소재들을 마구잡이로 쏟아내기만 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소설은 '재러드 디랙'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장대하면서도 가슴 시린 드라마 한 편을 독자들에게 선사한다. 옮긴이는, 존 스칼지의 이 우주시리즈가 <노인의 전쟁>, <유령여단>, <마지막 행성Last Colony>, 이렇게 3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유령여단>은 영화 스타워즈 시리즈의 <제국의 역습>에 비유할 만하다고 이야기한다. 가장 음울하면서도 시리즈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이기 때문이라는 말도 덧붙이고 있다. 아마도 이 소설이 전작(<노인의 전쟁>)보다 더 드라마틱하면서도 더 다양한 문제들을 독자들에게 건네고 있기 때문이리라.


  르레이와 에네샤, 오빈의 연합전선 구축이 이야기의 도화선이 된다. 이 세 종족의 연합을 부추긴 것은 우주개척연맹을 배신하고 오빈 진영으로 투항한 ‘샤를 부탱’이라는 과학자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세 종족이 연합한 동맹과 ‘샤를 부탱’의 목적은 끈질기고 집요한 우주개척연맹을 우주에서 몰아내고 개척 행성들을 나눠가지려는 것이다. 세 종족이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그 동맹 구축에 ‘샤를 부탱’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우주개척연맹은, ‘샤를 부탱’이 저장해 두고 간 그의 의식 패턴을, 군사적 용도로 생산해내는 특수부대용 신체에 집어넣는다. 우주개척연맹은 그렇게 생산된 특수부대원의 의식을 통해 ‘샤를 부탱’이 우주개척연맹을 배신한 이유를 알아보고, 세 종족이 진행시키고 있는 동맹 목적을 캐내려 한다. '재러드 디랙'은 그런 목적 하에 생산된다. 그러나 ‘재러드 디랙’은 처음에 ‘샤를 부탱’의 의식을 자신의 의식으로부터 끌어내지 못한다. 때문에 우주개척연맹은 ‘재러드 디랙’을 특수부대원으로 전입시켜 ‘샤를 부탱’의 의식을 끌어낼 수 있을만한 주요 전투에 투입시킨다. 이 과정에서 ‘재러드 디랙’은 ‘샤를 부탱’의 의식을 조금씩 감지하게 되고, 자신의 탄생(혹은 생산)의 의미와 자신의 의식, 그리고 자신의 의식을 덮어 누르면서 조금씩 잠식해오는 ‘샤를 부탱’의 의식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긴박감이 느껴지기도 하고 유머러스하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하며 때로는 슬프기도 한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등장하지만, 결국 이 소설이 건드리고 있는 문제는 ‘나’의 주체성과 존엄성에 관한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인류의, 좀 더 나아가서는 의식을 지닌 모든 생명체의 주체성과 존엄성이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다. 행성이 개척되고 전투가 벌어지고 배신이 일어나고 동맹이 구축되고 연합작전이 펼쳐지는 엄혹한 시간에 바깥으로 내던져진 ‘재러드 디랙’. 그는 친구를 만나고 동료와 교감하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그 사람을 잃어가는 짧은 삶의 시간 속에서 ‘나’라는 존재와 ‘나’의 의식에 대해 깊숙이 파고든다. '재러드 디랙'은 ‘샤를 부탱’의 의도를 읽어내기 위한 목적 하에 ‘샤를 부탱’의 복제품으로 태어났으나 의식 전이의 불완전함 때문에 특수부대원으로 차출되어 인류를 위해 싸우게 된다. 그런 ‘재러드 디랙’은 누가 보아도 목적성이 강하게 부여된 상태로 태어난 제품이었다. 그 때문에 ‘재러드 디랙’에게 주체성과 존엄성이란 것은 목적성에 비해 너무나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재러드 디랙’은 명령에 복종하는 군인이었기에 목적성은 더욱 중요했다.


  특수부대원의 훈련은 2주가 걸린다. 가브리엘 브라헤는 한 가지 질문으로 재러드의 분대, 공식적으로는 제8훈련분대의 훈련을 시작했다.
    너희가 다른 인간과 다른 점이 뭐냐? 답을 아는 놈은 손을 들어라.
  브라헤 앞에 불규칙한 반원 형태로 서 있던 분대는 침묵했다. 마침내 재러드가 손을 들었다. 그는 주디 퀴리가 한 말을 기억하고 말했다.
    다른 인간보다 똑똑하고, 강하고, 빠릅니다.
    그럴싸한 추측이다만, 틀렸다. 우리는 다른 인간보다 강하고, 빠르고, 똑똑하게 만들어졌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태어난 것도 우리가 달라서 따라오는 결과일 뿐이다. 우리가 다른 점은, 모든 인간 중에 우리만이 목적을 갖고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목적은 간단하다. 이 우주에서 인류를 존속시키는 것.
  분대원들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새라 폴링이 손을 들었다.
    다른 사람들도 인류를 존속시키는 일을 돕습니다. 여기 오는 길에 피닉스 정거장에서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목적으로 태어나지는 않았다. 너희가 본 사람들, 진짜내기들은 계획 없이 태어난다. 그들은 더 많은 인간을 만들라는 본능 때문에 태어난 것이다. 하지만 인간으로 태어난 뒤에는 무엇을 할지 생각하지 않아. 진짜내기는 자기 몸으로 무엇을 할지 손톱만큼도 모르는 채로 몇 년을 보낸다. 내가 이해하기에는 죽을 때까지 알아내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야. 그들은 멍하니 인생을 살다가 끝에 가서는 무덤 속으로 떨어진다. 슬프지. 비효율적이고.
- 가브리엘 브라헤 교관과 제8훈련분대 간의 대화 중, 117쪽-118쪽.


“이것 봐, 디랙.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나한테 자의식이 좋네 어쩌네 말할 수는 없어. 네가 너 자신이 아닌 다른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걸 의식하고, 다른 사람의 기억을 의식하고, 네 삶의 목적이 우주개척연맹이 지목하는 사람과 생물들을 죽이는 것에 불과하다는 걸 의식하면서 말이야. 넌 자아가 딸린 총이야. 차라리 자아가 없는 편이 나았을 텐데.”
- 샤를 부탱이 재러드 디랙에게 건네는 대사, 389쪽.


“언젠가 어느 현명한 누군가가 나에게 선택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지. 길지 않은 삶을 살면서 난 한 번도 선택을 한 적이 없어. 중요한 결정은 안 했다는 뜻이야. 하지만 이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선택을 마주했어. 살지 죽을지를 택할 수는 없지. 그 선택은 당신이 대신했으니. 하지만 당신의 계획을 돕는 것 말고 내게 다른 선택권이 없다고 생각한 건 당신의 실수야. 나에게 선택권이 있고, 나는 그 선택권을 행사했어.
  난 당신을 돕지 않아. 우주개척연맹이 인류에게 최선의 정부인지 아닌지 그 여부를 판단할 수는 없어. 나에겐 그 문제를 알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배울 시간이 없었어. 그렇다 해도 난 당신이 뇌도우미 범람을 도와서 수백만, 아니 수십억을 죽이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어. 어쩌면 내가 잘못 결정한 것일 수도 있겠지. 그래도 이게 내 결정이고, 내가 타고난 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결정이야. 인류를 안전하게 지킨다는 목적. (후략)”
- 재러드 디랙이 샤를 부탱에게 남긴 음성 메시지 중, 445쪽-446쪽.

  결말로 치달아갈수록 ‘재러드 디랙’은 ‘샤를 부탱’의 의식에 전이되어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러드 디랙’은 자신의 의식을 인지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권을 행사하려 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자신이 ‘샤를 부탱’의 의식을 복제해낸 특별한 제품이 아니라 존엄한 한 인간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조이가 말했다.
“그럼 됐네요. 나 배고파요.”
  세이건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 그럼 뭣 좀 먹으러 갈까.”
“좋아요. 엄마랑 아빠한테 인사하고요.”
  조이는 묘비로 달려가서 입을 맞추고, “사랑해요”라고 말한 다음 세이건에게 달려와서 손을 잡았다.
“준비 됐어요. 먹으러 가요.”
“좋아. 뭘 먹고 싶니?”
“뭐가 있는데요?”
“종류야 많지. 하나만 선택해.”
“좋아요. 난 선택 잘해요.”
  세이건은 아이를 꼭 안으며 말했다.
“그 말을 들으니 정말 기쁘구나.”
- 조이와 세이건의 대화, 466쪽-467쪽.

  조이의 대사 “좋아요. 난 선택 잘해요.”와 세이건의 대사 “그 말을 들으니 정말 기쁘구나.”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선택을 통해서 인간은 주체성을 획득하고 그 주체성을 통해 인간은 존엄해진다, 는 것이 바로 그 시사점일 거다. 물론 이 한 문장만으로 인간의 주체성과 존엄성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소설식대로 설명하자면, 주체성이란 선택의 기로에서 틔울 수 있는 인간만의 숭고한 싹이다. 그리고 주체성과 존엄성에 대해 모두 설명할 순 없지만, 바로 그 선택의 과정으로부터 인간은 자아를 형성해 나가고 주체성을 획득해 나갈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이 소설은 '어떻게 해야 보다 주체적이고 존엄해질 수 있는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니라, '어디에서부터 주체성과 존엄성은 싹트는가'를 말해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안하겠다. 그걸 알고 싶다면 직접 이 소설을 읽어보는 게 꽤 도움이 될 것 같다. 짧은 에피소드들로 엮어진 긴 이야기와 그 행간 속에 녹아있는 의미는 어차피 스스로의 힘, 즉 주체적인 힘으로 읽어내야 하는 것 아니겠나. 선택은 어차피 독자의 몫이다.



+ 좋아했던 대목들 중 한 토막.
  재러드는 내려다보지 않고 밧줄에 올랐다. 궁 위층을 지나면서 죽은 에네샤인 수십 명과, 그 뒤로 재러드의 전우들이 총과 수류탄으로 응사하는 와중에 그를 향해 총을 쏘는 수십이 넘는 에네샤인이 보였다. 재러드는 궁전 지붕에 보이지 않는 소대원에게 이끌려 그들보다 위로 올라가 몸을 돌려 새라 폴링을 보았다. 폴링의 손에는 멜빵이 들려 있었고, 아래에서는 에네샤인들이 그녀를 겨누고 있었다. 폴링은 멜빵을 드느라 밧줄을 탈 수 없었다.
  폴링은 재러드를 보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내 제일 소중한.
  그리고 그녀는 첫 번째 총탄이 몸에 박히는 순간 멜빵을 재러드에게 던졌다. 재러드가 손을 뻗는 와중에도 폴링은 전투복의 방어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의 총탄에 다리를, 몸통을 맞고 등과 두개골이 찢기며 춤을 추듯 흔들렸다. 재러드가 멜빵을 잡았을 때 폴링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려갔다. 그는 이것이 폴링의 마지막 모습임을 알았고, 정말로 그것으로 끝이었다.
  재러드는 수송선에 끌려 올라가면서 계속 비명을 질렀다.
- 새라 폴링이 재러드 디랙에게 건네는 마지막 대사, 219쪽.

+ 우주시리즈 3부작 외에, <세이건의 일기The Sagan Diary>와 <조이의 이야기Zoe's Tale>이라는 외전이 더 있다고 한다.

+ 현재 국내 출간은 <노인의 전쟁>과 <유령여단>, 두 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