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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설] 영원한 제국 - 이인화

by 오후 세 시 2011. 3. 31.
영원한제국(개정판)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역사/대하소설
지은이 이인화 (세계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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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6월의 일이었다.
나는 동경의 동양문고에서 우연히 『취성록(聚星錄)』이란 이상한 책을 발견했다. 『취성록』은 조선조 현종 1년, 그러니까 1835년경에 씌어진 책으로, 정조 시대에 규장각 대교(정7품) 벼슬을 한 이인몽(李人夢)이란 사람이 쓴 한문 필사본이었다.
(중략)
몇 장 넘겨보던 나는 깜짝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몇 장 훑어보는 중에도 정약용, 이 옥, 이학규, 이충익 등의 이름과 정조의 문체반정(文體反正)과 관련된 듯한 내용이 속속 눈에 들어왔는데, 그것은 바로 내 석사논문의 주제였던 것이다!
(중략)
서울로 돌아오자 취성록을 석사논문의 자료로 쓰겠다는 애초의 계획은 터무니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내용을 논문에 인용한다면 교수님들은 나를 좀 돈 놈이 아니냐고 말할 것이다.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은 이 책의 내용을 정사(正史)를 통해 입증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중략)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이 이야기룰 소설로 써 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 책의 내용들이 실제로 일어났고 또 역사의 진실이라는 어떠한 진리의 주장도 포기하고 아예 소설을 쓴다?
(중략)
지금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그 당시의 독특한 정치적 상황과 의식을 설명하기 위해 필자는 <나는>이라고 시작되는 1인칭 주인공 시점의 문장을 거의 모두 <이인몽은> 하고 시작하눈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의 문장으로 고쳤다. 가능한 한 원본에 충실하는 것이 옳겠으나 위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이 같은 재구성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구한다.
(하략)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 중 '0 책'


  영원한 제국은 이렇게 시작한다. 차례에 '0 책'이라고 표제를 달아놓았기 때문에, 그리고 본격적으로 '취성록'에 쓰여진 사건이 소설로 개작되어 시작되는 건 '1 승경도 놀이'부터였기 때문에, 나는 '0 책'이 작가의 서문(字文)쯤 되는 것으로 알고 이 책을 읽었다. '취성록'에 쓰여 있었다는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정조 24년(1800) 정월 십구일 규장각 대교인 이인몽이, 숙직을 선 날 아침 정조의 명을 받아 영조의 '서경천견록고'를 필사하던 규장각 검서관 장종오가 간밤에 죽어버린 것을 알게 된다. 같은 날 아침 채제공의 아들인 채이숙이 사학(邪學)을 전파한다는 죄목으로 전옥서이 끌려왔다가 모진 고문 끝에 숨진다. 헌데 채이숙은 숨이 끊어지기 직전, 규장각 이속인 현승헌을 정약용으로 착각하고 영조의 금등지사에 관한 이야기를 남긴다. 이인몽은 일련의 죽음들에서 어떤 음모를 직감하는데, 때마침 규장각에 몰래 들어왔다가 빠져나가는 내시부 이경출을 잡았다가 놓치면서 그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된다. 그리고 곧이어 이경출이 죽임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으면서 그 음모 뒤에 도사린 세력들이 결코 만만치 않은 거대 조직임을 알게 된다. 같은 날 정조는, 자신이 직접 명을 내렸던 규장각 검서관 장종오의 죽음과 규장각에 무단출입한 이경출의 죽음 간의 관련성에 대해 내시감 서인성을 추궁한다. 음모에 가담하고 있던 서인성은 모든 걸 부인하려 했으나, 정조가 서인성을 미끼로 삼아 거대한 음모의 주동 세력을 파악하려 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정조를 시해하려 한다. 그러나 서인성의 시해는 미수에 그치고 장용영의 위장에게 죽임을 당한다. 사건이 전개되면서 영조의 금등지사가 사건을 종결지을 수 있는 중요한 단서로 떠오르고 이인몽이 추측하던 거대 조직이 노론임이 서서히 드러난다. 영조 대에 집권한 노론 세력은 영조의 아들이자 정조의 아비인 사도세자를 모함하여 죽게 만든 이들이었다. 영조는 정조에게 사도세자에 관한 일을 함구하라 했으나 금등지사에 시경 빈풍편에 나오는 올빼미라는 시를 인용함으로써 노론 세력에 대한 불만을 극렬하게 드러냈다. 정조는 바로 이 영조의 금등지사를 물증으로 삼아 노론 세력을 내치려 한 것이었고, 노론 세력은 영조의 금등지사를 먼저 빼돌려서 노론에 대한 정조의 압박을 무위로 돌려놓으려 한 것이었다. 사건은 금등지사의 소재 파악과 그것을 차지하려는 노론과 남인의 대결 구도로 이어진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남인인 이인몽의 손에 영조의 금등지사가 쥐어지게 된다.



  이 책이 출판된 것이 1993년이니까 나는 18년 전의 베스트셀러를 읽은 셈이다. 치밀한 구성과 고전의 적절한 인용, 주요 사서를 동원한 역사 검증까지 과연 당시의 베스트셀러라 부를 만하다. 영원한 제국이 돋보이는 것은 특히 '0 책' 때문이다. 이 '0 책'은 이미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작가 이인화의 서문처럼 읽힌다. 헌데 정작 작가 이인화가 하려는 말은 책 말미 '작가의 말'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0 책'은 작가의 서문이 아니었고, 그 진실을 모르고 있는 독자들은 '0 책'을 읽는 순간부터 소설을 읽기 시작했던 것이란 말이다. 그러므로 소설은 외부의 작품과 내부의 작품으로 나뉘어진다. 내부의 작품은 주지하다시피 '취성록'에 쓰여 있다는 바로 그 이야기이고, 바깥 작품은 그 '취성록'을 발견하고 소설로 쓰게 되었다는 국문과 대학원생의 이야기이다. 바깥작품, 즉 '0 책'에서의 '나'는 작가 이인화가 아니라 가공된 화자였던 것이다. 동경 동양문고에 갔다는 둥, 취성록을 발견했다는 둥, 정사로 인정받을 만한 사료가 부족해서 소설로라도 옮겨야 겠다고 생각했다는 둥의 이야기는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구한다'는 말은 정말 쐐기를 박는 문장이었다. 당시 작가 이인화가 독자를 속여내기 위한 치밀함이 이정도였다. 속고 나면 좀 얼떨떨하지만, 이걸 알고 읽으면 또 작품을 읽는 묘미가 반감되는 게 사실일 것이다. 소설로 알고 읽는 것과 사실일 것이라는 가능성을 최대한 열어놓은 상태에서 읽는 것은 다를테니 말이다.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소설 후반부의 힘이 좀 달린다. 급작스러운 마무리가 허탈함을 준다. 기왕 독자를 속이기로 했는데 좀 더 거짓말을 해줬으면 좋았을 것 같다. 이건 뭐 열린 결말도 아니고, 그렇다고 벌여놓은 사건을 제대로 수습한 것도 아니다. 용두사미였다. 소설의 시작 부분인 '0 책'은 당시로서는 가히 빛난다고 해고 무리가 없었겠지만, 소설의 대미인 '8.세상의 먼지와 티끌'은 작가의 역량 부족을 너무 대놓고 보여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며칠전, 뿌리서점에서 2,000원 주고 샀던 책인데, 무료한 시간에 잘 읽었다. 어머니께 가져다 드리면 재밌게 읽으실 것 같다.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