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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 A
짧게 말하자면 건축가가 들려주는 건축 이야기이다. 흥미로울 듯 하지만 왠지 지루할 것도 같다. 비전공 분야란 늘 처음엔 흥미롭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지루해지는 법이니까. 오, 그런데 의외의 책이다. 건축학도가 아니어도, 건축에 대한 관심이 전무해도, 충분히 재미나게 들을 수 있는 건축 이야기를 작가가 들려주기 때문이다. 책을 펼쳐 본다. 생경한 건축의 세상이 함께 펼쳐진다. 그러나 어색하지 않다. 이 책은 건축학 개론서가 아니라 우리 생활 주변의 건축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01. 모형 속을 걷다
책 제목인 '모형 속을 걷다'를 본다. 건축가의 작명 센스라 그런지 책 제목이 참 단아하고 미적이다. '모형'이라는 단어는 모든 모형의 최상위 개념─이를테면 사각 모형, 원추 모형, 기하학적 모형 등과 같은 개별 모형들의 최상위에 위치한 개념─이기 때문에 형태가 있으면서도 정해진 형태가 없다. 즉, 모형이라는 점에서는 형상이 되지만 모든 모형의 최상위 개념이라는 점에선 추상이 된다. 따라서 '모형'은 형이하와 형이상을 넘나든다. 그리고 그 때문에 책 제목은 현상(現狀)을 관조하는 철학적 관념의 향기를 다분히 풍긴다.
첫 번째 단어와 두 번째 단어를 본다. '모형 속에서' 걷는 것이 아니라 '모형 속을' 걷는다는 이 표현은, '모형 속에서'라는 표상의 문법을 무너뜨리고 '모형 속을'이라는 함의의 문법을 취하고 있다. '모형 속에서'와 '모형 속을'은 어떻게 다른가. '모형 속에서' 걷는 주체는 애초에 모형 속에 놓여진 객체적 존재이다. 그러나 '모형 속을' 걷는 주체는 모형 바깥에서 모형 속을 향해 들어가는 주체적 존재이다. 얼핏 보면 '모형 속을'은 표상을 거부하고 함의만을 취하려는 듯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함의의 문법은 표상의 문법도 아우르고 있다. 표상의 문법인 '모형 속에서'가 표층적 의미인 '모형 속에서'만을 나타내는 것과는 달리 함의의 문법은 '모형 속을'이라는 표층적 의미 이면에 '모형 속에서'라는 심층적 의미를 함께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장의 주체는 '모형 속을' 향해 들어가는 주체이면서 종내엔 '모형 속에서' 걷는 객체로까지 이어진다.
세 번째 단어 '걷다'는 사색적이다. 전체 문장을 고려해 보면, 걷는 목적이 없기에 더욱 사색적이다. 목적 없이 걷는다는 것은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으로 비춰질 수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매임이 없고 여유롭다. 여유로움은 여가(餘暇), 소요(逍遙)와 일맥상통하며 이는 곧 사색(思索)으로 이어지기에, 마지막 단어가 갖는 사색적 느낌은 더 풍성하다. 또 '걷는다'와 같은 활용형이 아닌 '걷다'라는 기본형으로 마지막 단어가 사용됐기 때문에 앞선 '모형'에서와 마찬가지로 추상적 관념의 뉘앙스를 내비치고 있다.
'모형 속을 걷다'라는 전체 문장은 두 글자 쉬고 두 글자 쉬고 다시 두 글자라는 질서를 통해 깔끔한 운율감을 갖고 있어 싯구를 읽는 듯한 착각이 들게도 한다. 다분히 주관적인 견해이겠지만─책을 읽고 난 뒤라 더욱 그러할 수 있다─, 책 제목만으로도 이렇게 미학적이고 문학적이고 사색적인 아우라를 뿜어낼 수 있다니, 부러울 지경이다. 내게도 내가 쓴 저런 책이 딱 한 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잠시 부러움은 미뤄두고 작가가 모형 속을, 그리고 모형 속에서 거닐며 바라본 것들은 어떤 것들인지 한 번 살펴 보기로 하자.
#02. 이기심의 풍경
공동의 가치와 권리를 추구하면서도 개인의 재산과 이익을 무조건 규제/강화할 수 없다는 현실 앞에서 풍경은 자본의 논리대로 만들어진다. 빽빽하게 건물이 들어선 상업지역의 풍경은 건물 밀도가 곧 자본임을 보여준다. 만약 상업 지역에 비움을 주제로 지어진 건물이 있다면, 그리고 그 건물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스스로를 작게 좁게 낮게 하려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면, 그 건물의 모양이 어떻든 건축 미학과 관계없이 훌륭한 건물이다. 그 자세만으로도 이윤의 극대화를 취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글쎄, 그런 건물이 어디 있을까? 혹 있다면 '환경'을 앞세워 장사하고 '생태'를 앞세워 호객하는 세태를 보여주듯이 장삿속을 뒤로 감춘 채 선전/광고하기 위한 위장전술 ─ 예쁘장한 완상용 정원을 만들고 자연친화 운운하는 역겨움 ─ 이나 보여주지 않으면 다행이다.
『모형 속을 걷다』의 「이 땅엔 풍경마저 귀하다」 중에서
그가 모형 속을 걸으며 처음 본 것은 '빽빽하게 건물이 들어선 상업지역의 풍경'이다. 숨막히는 풍경, 이것이 그가 본 현상이다. 그렇다면 그 이면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숨막히는 풍경 저 너머에 자본을 손에 틀어쥔 자본가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들은 숨을 죽인 채 구석진 자리에 앉아 머리를 맞대고 제각각 테이블 아래에서 손셈으로 손익을 계산하고 있다. 작가는 이것을 '자본의 논리'라고 말한다. '숨막히는 풍경'이라는 현상 이면에는 '자본의 논리'가 도사리고 앉아 있는 셈이다.
잠시 샛길로 나와 '자본의 논리'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겠다. 어떤 이론이든 본래의 가치를 훼손시키지만 않는다면, 그 이론은 인류의 삶을 유익하게 이끌어가기 위한 수단으로 소용될 수 있다. 그러나 본래의 순수했던 가치가 파괴되면, 그때부터 목적이 수단이 되고 수단이 목적이 되는, 주객 전도의 사태에 이른다. '자본의 논리'도 마찬가지이다. 본래 자본주의는 '경쟁'을, 인류의 삶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으로 삼았다. 즉, 본래의 자본주의에서는 더 나은 인류의 삶이라는 목적을 위해 '경쟁'이 수단으로 작용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의 자본주의는 타락했다. 이는 자본주의의 순수했던 본래의 의도가 훼손되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자본주의가 다른 이론들과 마찬가지로 주객 전도의 사태에 이르게 되었음은 당연하다. 자본주의의 수단이었던 '경쟁'은 목적이 되고, 인류의 삶은 '경쟁'의 구역을 넓히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자본가들은 인류의 삶을 발판으로 삼아 '경쟁'에서 우위를 선점하려 하고, '경쟁' 세계에서 불멸하기 위해 끊이없이 인류의 삶을 소비 시장으로 끌어들인다. 자본주의를 주도해 나가야 할 자본가들에게 인류의 삶은 목적 외의 것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그들의 머릿속엔 오직 '경쟁'에 살아남기 위한 '최소 투입 최대 효과'의 깃발만이 나부낄 뿐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지어진 건축물은 그로테스크할 수밖에 없다. 높아진 건물 때문에 다른 건물이 햇빛을 받지 못하고 필요 이상으로 넓어진 건물 때문에 사람 지나다녀야 할 거리가 정갈하지 못함은 당연하다. 숨막히는 풍경 이면에 드리운 이 '자본의 논리'를 이기심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 이면에 자리잡은 이기심의 풍경, 이것이 현상 너머로 작가에게 관조되는 진실의 풍경이다.
#03. 삶에 가까운 건축
이쯤에서 우리는 살기 위한 집/건축이 삶의 방식을 수용하지 않으면 바람직하지 않다는 진부한 합의와 만나게 된다. 그렇다면 삶의 방식을 묻지 않고 지어진 집은 집이되 집이 아니고, 삶의 방식을 묻지 않은 삶은 살되 삶이 아니라는 것에 동의하게 된다. 문제는 점점 단순해진다. 삶다운, 집다운, 일상다운 건축은 건축 자체에 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는 방식에 답이 있다는 단순한 정리가 힘을 얻는다. 그렇다 건축은 삶과 같이 있거나 삶의 뒤편에 따라붙는 것이다. 먹지 않을 요리, 입지 않을 의상은 용납될지 몰라도 살지 않을 집은 용납될 수 없다. 삶이 빠진 채 그려진 살림 집은 허구의 건축이다.
『모형 속을 걷다』의 「어느 건축가의 꿈」 중에서
살(buy) 공간이냐, 살(live) 공간이냐를 결정하는 일은 매우 중차대한 일이다. 이 두 공간에 차이가 나는 것은 공간을 바라보는 관점과 공간 스스로가 갖는 가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살(buy) 공간에는 앞서 작가가 이야기한 '자본의 논리'가 개입되어 있다. 살(buy) 공간은 팔(sale) 공간과 대응하므로 이 공간은 팔아치워지거나 사들여지기 위한 공간으로 포장된다. 때문에 이 공간은 '자본'이라는 가치를 우위에 둔다. 반면 살(live) 공간에는 '삶(life)'이 개입되어 있다. 이 공간에 '자본의 논리'가 아주 개입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자본'의 문제는 '삶'이라는 본질적인 가치 아래로 밀려난다. 때문에 이 공간은 '삶'의 가치를 우위에 둔다.
그런데 살(buy) 공간이냐, 살(live) 공간이냐를 결정하는 것이 공간에서 직접 생활하게 될 사람의 권한만은 아니라는 점이 문제이다. 이를 결정하는 권한은 오로지 공간을 창출해 낼 능력을 지닌 사람, 즉 다시 말해 공간을 창출할 만한 자본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건축주, 건축가, 시공사들에게만 한정되어 있다. 따라서 거대한 자본을 지닌 자본가라면 스스로가 건축주가 되어 자신이 생활할 공간을 '삶'의 가치에 맞게 만들어 낼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삶'의 가치에 의한 공간 선택권은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작가가 바라보는 풍경이 작가에게 달갑지 않게 다가오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결국 모든 공간은, '자본'을 위시한, 있는 자들에 의해 '최소 투입 최대 효과'의 원칙만이 고수되며 만들어지고 있는 셈이다. '삶'의 가치는 저편 어딘가에 처박히고, 공간은 자꾸만 기형적으로 변해갈 수밖에 없다. 공간 창출의 결정권자들이 '자본'을 앞세우기만 하니 진짜 생활 공간을 원하는 사람들조차 '삶'보다는 '돈'을 먼저 고려할 수밖에 없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생활하는 공간을 선택할 때, '살 만한가?'보다는 '가격이 괜찮은가?'의 잣대를 먼저 들이대야 하는 슬픈 현실 속에서 살아나갈 수밖에 없다.
작가의 '건축은 삶과 같이 있거나 삶의 뒤편에 따라붙는 것이다'라는 문장은 '자본은 삶과 같이 있거나 삶의 뒤편에 따라붙는 것이다'라는 말로도 대체가 가능하다. 작가의 이 호소력 짙은 목소리는 삶과 함께 있어야 할 집이 투자 대상으로 전락해버리고 있는 이 같은 상황에 따금한 경종을 울린다. 하지만 양심적인 이 건축가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는 이는 아무도 없는 것 같다.
#04. 건축의 결론은 사람이다
최근에 나는 작업 공간을 옮겼다. 세들어 있는 작업 공간을 옮기는 일은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다. 아무리 이삿짐센터에서 포장이사를 해준다 해도 도면·모형·각종 자료들은 상하기 쉬우니 직접 챙길 수밖에 없다. 녗 날 며칠 짐을 옮기고도 모자라 엄청난 분량의 건축 모형을 버려야 했다. 촬영을 해놓고 버리긴 했으나 공들여 만든 건축물 모형을 버리는 것은 눈물 나는 일이다.
(중략)
모형을 부수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어쩌면 모형을 만들 때보다 더 많은 생각을 했다. 만들 때보다 더 많이 생각하면서 부수는 경험은 참으로 소중하다.
(중략)
이제 이사를 끝냈으니 다시 모형을 부지런히 만들어야겠다. 생각의 집을 위하여, 사람의 집을 위하여, 아니, 아니, 사람들을 위하여. 그래 언제나 건축의 결론은 사람이다. 사라진 모형들이여, 공간의 꿈이여.
『모형 속을 걷다』의 「사라진 모형 이야기」 중에서
몇 년 전 향적당 완공 행사를 부처님 오신 날로 잡았다. 부처님 오신 날은 대중들도 많이 온다. 아니 오는 대중들이 다 부처이다. 봉축 법회 때 외국 신부님의 축하 말씀이 있었다. "……외국 신부가 자꾸 절에 가고 참선 배우고 하니까 사람들이 '저 신부 개종하려나 보다'라고 말하는데 저는 부처님 말씀 배우면서 제가 믿는 하나님의 존재를 더 깊게 체험합니다. 부처님 오신 것을 축하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 이어지는 신도들의 합장. 신부님도 합장. 열린 종교 의식은 그런 것이다. 주지 스님이 열리니 절도 열린다. 아니, 절이 열리니 사람이 열린다. 다시 건축의 끝은 사람이다. 종교의 끝도 사람이고 사람의 끝은? 사랑이다. 사라진 모형 사진을 보며 난 또 사랑을 배운다.
『모형 속을 걷다『의 「사람이 열려야 집이 열린다」 중에서
그가 대화하듯 쏟아내는 이야기들을 듣고 있노라면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건축의 끝이 사람이라는 그의 말은 건축이란 건축가의 예술적 지향점이 되어서도 안되고 시공사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도 안된다는 뜻을 함축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건축이란 어디까지나 사람 사는 공간, 소통하는 공간을 만들어내기 위한 끊임없는 인간애적 모색이다.
살게 될 사람의 성향, 거주하게 될 사람들의 목적, 이웃들과의 소통 가능성이 그에게는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이 된다. 돈이 얼마나 들고 시간이 얼마나 소요되느냐는 그 다음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그가 하는 건축의 끝은 사람과 맞닿아 있다. 건축을 하면서 느끼게 되는 사람에 대한 무한한 관심과 애정이 그의 글 위로 철철 넘쳐 흐른다.
그의 말이 맞다. 무엇이든 그 끝에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사람의 끝에는 항상 사람이 있다.
#05. 사람을 향한 건축, 채나눔
그의 글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사람을 향한 건축'일 것이다. 그러하기에 건축과 관련된 그의 이야기가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게 읽히는 것이리라. 사람에 대한 사랑, 자본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있는 이기심에 대한 날 선 비판, 건축에 대한 깊은 사색, 이 세 가지가 만나 형성된 작가의 건축 철학이 바로 '채나눔'이다. '불편하게 살기', '밖에서 살기', '늘려서 살기'라는 모토를 지닌 그의 건축 철학 '채나눔'은 나태해지기 쉬운 사람들을 잡아 끌고, 건축과 자연의 조화를 추구하며, 공간의 여백을 소통의 통로로 활용하고자 한다.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나태함, 사람들이 존재하는 공간의 중요성, 사람 사이의 자연스러운 부딪힘을 고려한 그의 건축 철학은 역시 사람을 향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글을 모두 읽고 나니 그의 글에서도 또한 사람에 대한 그의 무한한 관심과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글에서 유독 사람 냄새가 풀풀 풍기는 것은 그 때문인 듯싶다. 또 그의 글은 건축물처럼 안정되고 정리된 느낌이 강했다. 작가는 아마도 글을 쓰는 과정이 건축 모형을 만드는 과정과 다를 것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의 글은 흔들림 없이 안정정이면서도 따뜻함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의 글은 그의 건축 철학 못지 않게 사람을 향해 있다 할 수 있다.
덧)
그래서 깨어 있는 자들은 늘 현실이 역사임을 아는 것이다, 잊지 않고. 우매한 자들은 현실의 적층積層이 미래의 역사임을 모르고 일만 계속 저지른다. 편의 우선의 개발, 단기 이익 우선의 땜질 정책, 소비 우선의 환경 파괴, 시각 효과 우선의 모방 등이 단적인 예이다. 현실의 공허는 그대로 미래의 허무를 그려낸다. 이 땅에서 목도되는 건축의 현란함과 몽매함이 고스란히 내일로 미루어놓은 환경미화 대상은 아닌지 반성할 때이다. 찬란한 역사를 자랑하면서 미래의 문화재─ 당대의 건축물 ─를 만들지 못하는 것이나, 엄청난 양의 종교 건축물을 지으면서 걸작 하나 없는 현실은 너 나 할 것 없이 부끄러워할 일이 아닌가.
『모형 속을 걷다』의 「사람이 열려야 집이 열린다」 중에서
이 부분을 읽으면서 누군가 떠올랐다. 편의 우선의 개발, 단기 이익 우선의 땜질 정책, 소비 우선의 환경 파괴, 시각 효과 우선의 모방, 작가의 건축 철학은 정말 많은 것들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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