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더미/내가 읽은 책

[책/시] 호사비오리 - 이한종

by 오후 세 시 2011. 3. 10.
호사비오리
카테고리 시/에세이 > 장르시 > 현대시
지은이 이한종 (북인, 2010년)
상세보기


  이한종 시인의 유고 시집 <호사비오리>를 읽었다. 총 63편의 시들로 엮어졌다. 각각의 시들은 지면 위에서 저마다의 이야기로 아슴푸레 빛났다. 시인의 첫 시집이자 마지막 시집이었다.


#01 나와 세상의 일치

  첫 시는 '호박순'이라는 시이다. 나는 이 시가 序詩로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호박순이 오엽송 가지 끝에서 자꾸 하늘로 기어오르려 / 꼼틀꼼틀 한다 / 가느다란 더듬이로 허공을 감으며 오르려 한다 / 내 안의 허공도 이 세상 그 무엇의 더듬이에 감긴다 / 고개 번쩍 치켜든 호박순 / 내 의식의 나무 가지 끝에서 자꾸 하늘로 기어오르려 / 꼼틀꼼틀 한다"('호박순' 전문)

  이 시를 통해 시인은, 시집 뒤편에서 정진규 시인이 말한 것처럼, '대상과 자아의 만남'을 통한 '동격화'를 이뤄내고 있다. '가느다란 더듬이로 허공을 감으며' '하늘로 기어오르려'는 호박순의 모습에 '의식의 나무 가지 끝에서 자꾸 하늘로 기어오르려'하는 시적 자아가 대입됨으로써 대상과 자아가 동격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안의 허공도 이 세상 그 무엇의 더듬이에 감긴다'고 했다. 시적 자아는 '하늘로 기어오르'기 위해 허공을 더듬는 주체인 동시에, '이 세상 그 무엇의 더듬이에 감'기는 객체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좀 더 분명히 이야기 하자면, 이 시는 주체와 객체의 일치, 즉 자아와 세계의 일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호박순이 주체일 때, 세상(하늘 혹은 허공으로 상징되는 드넓은 공간)은 호박순의 더듬이에 감기는 객체가 된다. 그리고 시적 화자는 세상이 주체일 때, 세상의 그 무엇에 감기는 객체가 된다. 이후 "고개 번쩍 치켜든 호박순 / 내 의식의 나무 가지 끝에서 자꾸 하늘로 기어오르려 / 꼼틀꼼틀 한다"에 이르면 시적 화자는 세상의 그 무엇에 감기는 개체이면서 동시에 호박순과 동격화되는 주체가 된다. 따라서 시적 화자는 무엇인가를 감으려 하는 주체이면서 무엇인가에 감기는 객체라고 볼 수 있으며, 주체일 경우에는 세상을 감으려 하고, 객체일 경우에는 그 무엇에 의해 감기는 세상 그 자체가 된다. 자아와 대상(호박순)의 동격화를 넘어선 자아와 세계(자아의 외부에 존재하는 세계의 총칭)의 일치는 이렇게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이 자아와 세계의 일치는 이 시집의 큰 줄기를 이루고 있는 중요한 테마이다.

  시집에서 자주 보이는 단어들을 몇 개 추리면, '봄, 꽃, 대지, 바다, 잉태(무엇인가를 밴다는 표현), 출산, 허공' 등이다. 이런 단어들을 시의 내용에 따라 정리해 보면, 시인이 시를 쓰면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게 무엇이었는지 분명해진다. 그리고 거기서 '일치'의 문제가 왜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02 채움의 치열함

  봄은 약동의 시간이다. 잉태되었던 무엇인가가 출산되는 시기인 것이다. 바로 그 때 대지로부터 출산되는 것들이 바로 꽃이다. 씨앗은 새순을 올려 꽃을 피우기 위해 생명을 탐한다. 허공을 향한 끊임없는 솟아오름이 바로 생명을 탐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대지는 잉태되고 출산되는 모든 것의 어미이다. 육지를 벗어나면 바다가 어미의 역할을 한다. 대지와 바다로부터 태어난 모든 것들은 세상을 생명력으로 그득그득 채워나간다.

"봄을 밴 정원은 비릿하다"('새순' 일부)
"바위틈에 뿌리박힌 철쭉이 꽃망울을 허공으로 밀어 / 올리고 있다 / 중략 / 봄을 밴 나무들이 꽃망울을 밀어 올리느라 몸을 / 움찔움찔 한다"('철쭉' 일부)
"옹알옹알 배냇짓하다가 땅의 젖을 빨다가 장맛비에 훌쩍 몸을 키우더니 한여름 이삭을 배고, 퉁퉁 부운 자궁을 열어 하얀 세상을 밀어 올린다 가느다란 목으로 우주를 떠받히고 있는 저 벼들의 힘!"('벼' 일부)
"고리서 불어온 바닷바람이 월내에 양수 냄새를 풍긴다 바다의 대음순이 푸르게 엉겨 일어난다 월내는 원래 달을 배는 곳이다 월내의 여인들은 원래부터 만삭이다 늘 아이를 배고 있다"('월내는 원래 달을 배는 곳이다' 일부)

  잉태와 출산, 그리고 생명을 향한 끊임없는 열망. 비어있는 곳을 채워나가는 바로 그 열망. 만나고 엉키고 부풀어져 가기 위한 열망. 그것이 바로 삶을 이끌어 나가는 원동력이다. 여기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태어나는 모든 생명의 고귀함과 그 삶을 이끌어 나가는 치열함이다. 그런 삶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이 어떠한가는 '벼'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옹알옹알 배냇짓'한다는 표현만 봐도 알 수 있다. 얼마나 따뜻하고 애정어린 시선으로 세상의 많은 삶들을 바라보고 있는가. 시를 읽는 사람의 입가에 미소를 드리우게 한다.


#03 비움의 황홀함

  그러나 생명이란, 또 삶이란 그것만으로 모두 설명해낼 수 없다. 생명 혹은 삶에는 야위어가고, 사위어가는 것들 또한 존재하기 마련이다. 허나 야위어가고 사위어간다고 해서 마냥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갓 태어난 생명과는 또 다른 깊이가 있다. 그 깊이는 묵직하고 엄숙하다. 충만했던 생명력이 조금씩 조금씩 소진되어가는 삶, 그렇게 야위어가고 사위어가는 삶을 비워져가는 삶이라고 표현해도 될 것 같다. 그러므로 삶이란 달리보면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비워내는 것일는지도 모른다.

"시선을 들어보니 나뭇가지에는 한 잎의 은행잎도 붙어 있지 않았다. 남김없이 비운 가지의 씨눈마다 송송 달린 물방울이 아침햇살을 눈부시게 피워 올리고 있다. 비워내어 황홀한 시월"('시월' 일부)
"바다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정화조다 배 한 척 떠나보내기도 한다 가물가물 멀어져 가는 바다의 뒷모습을 바라보게도 한다 가득 차면 비워내는 바다의 섭리를 기억하고 있다 기억을 정지시키기도 한다 기억의 정지는 황홀이다 황홀에 싸여 더 먼 황홀을 꿈꾸게도 한다"('바다는 밀었다 썰 뿐이다' 일부)

  시인은 그런 비워내는 삶을 '황홀'하다고 표현한다. 가을에 낙엽이 떨어지는 일은 얼마나 황홀한가. 썰물에 비워진 바닷가 또한 황홀하기 그지없다. 많은 세월을 떠나보내본 삶만이 떨어뜨리고 놓아버리고 떠나보내는 일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 이전의 삶은 만나고 엉키고 부풀어져가면서 채우기에만 급급할 뿐이었다. 그래서 비워내는 삶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은 공허하지 않다. 시인은 그런 삶을 슬프지 않게 바라본다. 시인에게 비워내는 삶은 그저 '황홀'할 뿐이다.


#04 채움과 비움

  앞에서는 물론 채움과 비움을 따로 나누어 보았다. 그러나 시인이 정작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채움이 곧 비움이고 비움이 곧 채움이라는 것이다.

"산의 살, 등줄기 굽이굽이 피명이 들고 / 차츰차츰 푸른 옷을 정수리서 발목까지 벗겨 내리는 거다 / 알몸 벌겋게 부어오르고 있는 거다 / 푸들푸들 국부를 떨고 있는 거다 / 가을산은 가장 처참한 사랑을 하고 있는 거다 / 온 몸 활활 타들어가는"('단풍' 일부)
"온갖 꽃들은 이 가을 낙화되어 모두 달아나 버렸지만 우리가 기대어 이야기하던 담벼락에 아직은 담장이 잎이 붉어져가고 넝쿨 기어가는 소리 담돌 이음새 마디마디 너의 피도는 소리 들린다 바다야 바다야 내 마음의 갯벌아"('마음의 갯벌' 일부)
"철길 끝이 바다의 끝에 닿고 있다 끝과 끝이 만나고 있다 (중략) 기차를 타고 여행을 떠난다 햇빛을 지나 달빛을 지나 진한 푸르름의 꼭지에 이르면 해구가 나온다 해구는 적멸이다 (하략)"('동해남부선 간이역에서 적멸로 가는 기차표를 팔고 있다' 일부)

  가을은 결실을 맺는 계절이면서 동시에 맺은 결실을 떠나보내는 계절이다. 그러나 그 결실에는 또 씨앗이 있다. 도착점 속에 떠나보냄이 있고 떠나보냄 속에 다시 출발점이 있다. '끝과 끝이 만나'는 지점에 다시 시작이 있는 셈이다. 그런데 그것을 알아가는 과정은 '굽이굽이 피멍이 들고', '알몸 벌겋게 부어오르고', '온 몸 활활 타들어'갈 정도로 '처참'하다. 그건 어느 정도의 삶을 살아내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인생의 가을 정도되는 지점에 가봐야 그 처참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처참함을 겪기 전까지는 만남과 떠남이, 채움과 비움이, 삶과 죽음이 하나로 통한다는 걸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세상에 대해서도 담담해질 수 없다. 인생의 가을 정도되는 지점에 와봐야, 놓을 수 밖에 없었던 것, 떨어뜨릴 수 밖에 없었던 것, 떠나보낼 수 밖에 없었던 것들이 인생의 '담돌 이음새 마디마디'에 '피도는 소리'로 다시금 되돌아옴을 알 수 있다. 채워짐이 비워짐으로 비워짐이 다시 채워짐으로 갱신한다.

  대지로부터 출산되는 것들은 대지가 비워짐으로 인해서 생명을 얻는다. 식물은 대지의 물을 빨아들이고, 짐승은 대지 위의 생명들을 먹이로 삼기 때문이다. 이것이 봄과 여름의 삶이다. 가을에 식물은 나뭇잎을 대지 위에 떨구어 주고, 황혼기에 접어든 짐승은 제 목숨을 대지 위에 바친다. 그것이 가을의 삶이다. 다시 대지는 가을의 삶에 들어선 식물과 짐승을 받아들여 새로운 생명들을 탄생시킨다. 채움과 비움은 이렇게 갱신하고 갱신하면서 이전의 삶들과 이후의 삶들을 이끌고 이어준다.


#04. 적멸에서 다시 새순으로

  삶은 이어지고 또 이어진다. 자연의 섭리가 그러하다. 죽음은 삶으로, 삶은 죽음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죽음이 삶이고 삶이 죽음이다. 자아와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자아가 곧 세계이고 세계가 곧 자아인 것이다. 처음에 '일치'에 대한 이야기가 중요하다고 말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 과정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물아일체가 되어가는 과정은 '처참'하다. 시인은 아마도 그 처참한 과정을 시를 통해 몸소 겪었으리라고 본다. 물아일체가 되어가는 처참한 과정을 겪고 나면 그 끝은 자아와 세계의 합일, 적멸로 이어진다. 그렇다고 완전한 끝은 아니다. 적멸에 이른 삶은 또 다른 삶의 양분이 될 것이기에. 돌아가신 이한종 시인의 유고 시집은 바로 그 양분이 아닐까 한다. 이한종 시인의 부인은 이한종 시인이 잠든 묘지 곁에 '새순'이라는 시비를 세워두셨다고 한다.

"참새 떼가 봄을 콕콕 쪼아 새벽 속에 묻으며 시끄럽다 / 간밤 가랑비에 젖은 땅이 부스스 몸을 턴다 // 새 발 모양인 작약 새순이 봄의 가장자리를 뛰어다니며 / 꽃의 내일을 살랑살랑 오늘처럼 흔든다 // 햇살이 그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며 자꾸 올라 탄다 / 작약 새순이 햇살에게 몸을 살짝 내주는 것이 보인다 // 봄을 밴 정원은 비릿하다"('새순' 전문)

  이한종 시인이 유고 시집으로 남긴 시집도 '봄'을 밴 듯 비릿하다.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시집이 처음과 마직막은 꼭 한가지라는 것을 일러주는 것만 같다. 그래서 더욱 더 그 시집이 곧 출산할 무엇인가를 그득그득 밴 것 같다. 적멸에 이른 이한종 시인의 시집이 독자들의 가슴에 수많은 새순들을 싹틔워줄 수 있기를 바란다. 그 순간이 바로 처음과 끝, 채움과 비움이 일치하는 순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