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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더미/내가 읽은 책

[책/문화] 유행심리 - 마르끄 알랭·데깡 / 이연숙 옮김

by 오후 세 시 2009. 4. 30.
유행심리(사회심리씨리즈 3)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지은이 마르끄 알랭 외 (동국출판사, 19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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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 B+

  구독하는 블로그 중에 도서과니스트 혜란님이 운영하는 Libralist Monolog라는 북로그가 있다. 혜란님은 도서과니스트답게 엄청난 양과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두루 섭렵하고 있는데, 이런 훌륭한 독서벽과 함께 까칠한 듯하면서 통통 튀는 혜란님만의 독특한 필치는 Libralist Monolog가 맛깔나는 북로그로 거듭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얼마 전, 혜란님의 포스트를 읽고 나서 마르끄 알랭·데깡의 『유행심리』라는 책을 집어 들었다. 『유행심리』라는 책에 대한 혜란님의 포스트가 재미있기도 했고 나 스스로가 '유행'이라는 단어에 혹한 탓도 있었다.

  전체적인 느낌은 '어렵다'는 것, 그리고 나처럼 범상한 독자가 접근하기에는 범상치 않은 책이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사회심리학자의 연구 논문을 번역한 책이기 때문에 그런 듯했다. 책 제목인 '유행심리'는 저자인 마르끄 알랭·데깡을 유행에 관련된 일이나 패션계에 종사하는 인물로 추정하게 한다. 하지만 예상외로 그는 프랑스의 사회심리학자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유행'을 사회심리학적으로 기술한다. '유행'은 사회현상이나 사람들의 심리를 변화시키고, 동시에 사회현상이나 사람들의 심리는 '유행'의 변화를 야기시킨다. 저자는 바로 이들 상호간의 관련성을 사회심리학적으로 풀어나간다고 볼 수 있다.

  책은 '제1부 유행의 메커니즘', '제2부 복식의 유행', '제3부 의복 이외의 유행'이라는 큰제목을 갖고 있다. '유행'이란 일종의 문화적 흐름 혹은 시대를 거쳐가는 물살로 인식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저자는 '유행'을 사회·문화의 형태·종류·발전·변화와 기계처럼 맞물려 돌아가며 상호작용하는 메커니즘적 양식이라고 정의 내린다. 이렇게 '유행'을 단순한 흐름이 아닌 사회·과학적 산물로 인식하는 저자의 새로운 사고방식이 제1부에 녹아있다. 제1부는 저자가 '유행'을 자신만의 철학적인 시선으로 관조하고 있는 부분인데, 제2부와 제3부를 이해하기 위한 전제가 된다 할 수 있다.

  제2부는 'A. 소재의 연구'와 'B. 문화적 영향의 연구'로 나뉜다. 'A. 소재의 연구'에서는 의복 소재들의 성격과 그 소재들이 지닌 심리학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를테면, 모피는 '고귀함' 혹은 '값비쌈'을 나타내고 가죽은 '외향적'이고 '남성적'임을 나타내며 실크는 '관능'과 '여성적'임을 나타낸다는 식이다. 'B.문화적 영향의 연구'는 스포츠, 여성, 청소년의 문화가 '유행'에 끼친 영향을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면 드레스, 미니스커트, 팬티스타킹, 판탈롱 등의 유행에는 여성들의 사회·문화적인 심리가 무의식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3부는 '1. 확장된 유행의 장'과 '2. 여러가지 열중'으로 분류된다. '1. 확장된 유행의 장'은 다시 'A. 의복의 액세서리', 'B. 신체와 그 기술', 'C. 주거에 관한 것'으로 나뉘는데 'A. 의복의 액세서리'에서는 모자, 소형 파라솔, 지팡이, 우산, 장갑, 핸드백, 장신구, 구두, 신발, 안경, 손목시계 등의 액세서리의 유행에 관한 것들이 다뤄지고, 'B. 신체와 그 기술'에서는 헤어 스타일, 수염, 메이크업, 메니큐어, 향수 등에 관련된 것이 다뤄진다. 그리고 'C. 주거에 관한 것'에서는 가구, 디자인, 예술작품과 회화, 식물, 동물, 자동차 등에 관련된 것을 다뤄진다. 전반적으로 위와 같은 소품들과 '유행'의 심리가 어떻게 맞닿아 있는가에 대해 서술하고 있으며 필요할 경우 종교적인 측면, 역사적인 측면, 소비적인 측면, 음식문화의 측면과도 연결짓는다. '2. 여러가지 열중'은 'A. 보르가디스', 'B. 현재 보이는 점에 대한 연구', 'C. 언어', 'D. 가제트(gadget)'로 나뉘긴 하는데, 간단히 언어, 가제트로 나뉜다고 봐도 무방하다. 저자에 따르면, '열중'이란 '유행과는 비슷하지만 또 다른 성격을 지닌 것'이다. '유행'이 영속성을 획득하고 오래 지속되는 것과는 달리 '열중'은 엄청난 속도와 범위로 어떤 대상에 대한 관심이 갑작스럽게 일어났다가 금새 식어버리는 일시적인 현상이다. 저자는 여러 현상들 중에서도 언어와 가제트를 '열중' 현상의 대표적인 사례로 보고 있다.

  저자는 제3부까지 풀어냈던 의견들을 종합하면서 「유행, 그 신비의 정체」라는 짤막한 글로 유행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간단히 재정리한다. 내용인즉, '유행'에는 무의식적인 작용과 반작용의 힘이 미치는데 이 무의식의 메커니즘을 명확히 파악해 내는 것이 '유행'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라는 것이다.

  기대했던 '유행'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유행'을 바라보는 신선한 관점이 돋보인 덕분에 어려워 하면서도 재미있게 책을 읽었다. 단연 관심이 쏠리는 부분은 '열중' 현상 중에서도 '언어'에 관한 부분이었다. 흔히 우리가 유행어라고 부르는 언어들-연예인들이 만들어내는 언어 현상이나, 인터넷상에서 급속도로 퍼졌다가 사그라드는 언어 현상 등-에 대한 맥락을 다시 한 번 짚어볼 수 있는 계기가 돼서 좋았다. 또한 '유행'을 패션과 직접적으로 연관짓기 쉬운데 '유행'이라는 현상이 의복 패션 뿐만이 아니라 각종 사회·문화 현상-이를테면, 영화나 책 등에 나타나는 유행, TV 프로그램에 나타나는 시기적(時期的) 경향, 때에 따른 스포츠 종목의 인기 변화 등-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편협했던 사고방식을 깨뜨리는 훌륭한 자극제가 되었다.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 인류가 현재 누리고 있는 것들, 그리고 인류가 버린 것들을 떠올려 보면, 어떤 이유에서든 필요한 것은 취해졌고 필요없는 것은 버려졌다. 주어진 것을 향유하고 불필요한 것을 버리는 일은 인류가 참된 문화를 가꾸어 나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 인류가 그것을 취사선택하게 되었는지 그 무의식의 메커니즘을 파악하는 일도 중요하다. 그 이유를 밝혀냄으로써 우리는 인류의 사회·문화를 추동하는 그 무엇인가를 제공받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그동안 그 이유를 찾기 위해 깊이 사유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어느 정도의 결과물도 획득했다. 마르끄 알랭·데깡은 그들 중 한 사람으로서, 인류의 전유물 중 '유행' 속에 내재된 이유를 찾기 위해 사유했고, 그 이유에 대해 가까이 근접할 수 있었다. 그것을 사유하는 그의 여정은 재미있기도 했겠지만 틀림없이 고달펐으리라. 하여 '유행'에 대한 그의 신선한 사유에 경의를, 그리고 그 결실을 인류에게 선사하기로 한 그의 나눔에 고마움을, 표한다. 그의 결실을 한 권의 책으로 만난 것은 커다란 즐거움이자 축복이었다. 그 만남이 조금은 힘들고 고달팠지만, 그가 결실을 이룩해내기까지 부단히 겪어야만 했던 수고로움에야 비할 바가 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