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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관심/시

[시] 관계 - 심언주

by 오후 세 시 2012. 4. 5.

 


4월아 미안하다

저자
심언주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07-03-26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2004년 「현대시학」에 '예감' 외 4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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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계 - 심언주

 

  비둘기 그림자는, 비둘기 곁에서 콘크리트 바닥을 쪼아 댄다. 제법 곁눈질이 늘어 비둘기보다 큰 부리로 비둘기보다 더 깊이 바닥의 침묵을 흠집 낸다. 기회를 보아 비둘기를 생포할 자세다. 그러나 비둘기가 날아오르면 제 아무리 큰 보폭으로 쫓아가도 얼마 못 가 비둘기의 속도를 놓쳐 버린다.

 

  꽃이 꽃을 버리는 줄 모르고 꽃 그림자는, 홀로 취해 제 향기를 날린 적이 여러 번 있다.

 

<4월아, 미안하다>, 2007, 민음사.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어나갈 때의 나는 '그림자'처럼 스스로의 자세에 '홀로' 도취해 만족스러워 하곤 한다. 상대를 배려하는 모습이 마치 '그림자'같다고나 할까. 상대가 보여주는 몸짓에 맞춰 '그림자'처럼 따라 가는 '관계'맺기의 여정은 때로 꼬깃해진 자존심으로 비굴하게 엎드려야 할 때도 있긴 하지만 그런대로 견딜만 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대는 내 존재를 '그림자'처럼 익숙하게 느낀다. 그러나 제법 괜찮은 '관계'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에 파장의 싹이 트곤 한다. 거기까지 가보고 나니, 나는 상대에게 아무것도 보여주질 못했었다. 그 사실을 뒤늦게 인식하고 나면, 우리가 있던 자리엔 별로 남아 있는 게 없다. 우리랄 것도 없다. 상대와 상대의 움직임에 반응하던 '그림자'만이 있었을 뿐. 그러니까 '그림자'처럼 어두침침한 색으로 상대를 따라가기에만 급급했던 게 문제였다. 그리고 잘 하고 있다며 스스로의 모습에 흠뻑 취해있었던 것도. 그러니 상대가 떠난 자리엔 빛이 들어도 그림자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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