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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관심/시

[시] 박쥐 - 채호기

by 오후 세 시 2011. 12. 8.
지독한사랑(문학과지성시인선119)
카테고리 시/에세이 > 장르시
지은이 채호기 (문학과지성사,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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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 채호기


나의 집은 동굴입니다
하늘은 별도 없는 검은 고무판
때로 매캐한 연기가 새기도 합니다

나의 집에는
공공연히 토막난 시체들이 썩어가고
뼈들이 하얀 인광을 반짝거리기도 합니다
겁 많고 어리석은 여자들이 윤간되기도 하지만
비명은 한번도 바깥으로 새어나간 일이 없습니다
음흉하기만 한 벽들은
비명마저 약한 자에게 되돌려주고 맙니다

나의 집은 감옥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 사실을 오래 기억하지 못합니다


<지독한 사랑>, 1992, 문학과 지성사.





01. 어둠 속의 한 줄기
  한국투명성기구에서 제정한 2011년 투명사회상 수상자로 주진우 기자(시사 IN), 영화 <도가니>, 이상돈(인천광역시 감사옴부즈만), SBS 스페셜 <대한민국에 정의를 묻다>가 선정되었다고 한다. 칠흙같은 어둠 속에서 멀리 피어오른 밝은 불빛 하나를 본 느낌이다. 약은 기득권자들이 자신들이 선점한 고지를 지켜내기 위해 온갖 매체를 향해 가혹한 폭압을 가하는 가운데에서도, 대중들의 '알 권리'를 위해 그 폭압 아래 굴복하지 않았던 그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어둠이 가신 건 아니다. 여전히 바깥 세상은 깜깜하고 춥다. 투명사회상 수상자들이 밝혀낸 불빛은 그 어둠을 아주 잠시 동안만 몰아냈을 뿐이다. 대중들이 그 불빛을 향해 모여들면, 어둠 속에서 기득권자들의 하수인들은 그 불빛과 빛을 향해 모여든 대중들을 향해 무자비하게 물대포를 쏘아 댈 것이다.

02. 우리가 사는 세상
  우리가 사는 요즘 세상이 그렇다. 어둡고 춥고 무자비하다. 대중들이 빛을 향해 모여들면 거기에 물대포를 쏘는 게 예삿일처럼 일어나고 있다. 헌데 이 예삿일이란 게 참 무섭다. 악의적인 기득권자들은 이런 통제 시스템을 반복하면서 대중들의 감각을 마비시킨다. 처음 쏘아대던 물대포에 대중들은 광분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그런 과정이 반복될수록 대중들은 광분하다가 분노하고, 분노하다가 화를 내고, 화를 내다가 '이번에도 물대포야?'라고 생각하고, 그러다가 그러다가 나중엔 '당연히 물대포 쏘겠지'라고 생각한다. 공공연한 폭력에 둔감해져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채호기의 <박쥐>에서도 그런 세상이 보인다. '별도 없는 검은 고무판'이 '하늘'인 희망 부재의 깜깜한 세상. '공공연히 토막난 시체들이 썩어가고', '겁 많고 어리석은 여자들이 윤간되'는, 폭력으로 썩어문드러진 세상. 폭력 때문에 발생하는 대중들의 공포를 다시 대중들에게 고스란히 되돌려줘서 겹겹의 공포를 느끼게 하는, 곧 '비명마저 약한 자에게 되돌려주'는 파렴치한 세상. 파란 하늘이 보이지 않는, '동굴'같고 '감옥'같은 세상. 채호기는 <똥통>이란 시에서 그런 세상을 이렇게도 표현했다.

지금은 말할 수가 없습니다. 통똥에 빠졌으니까요.
햇빛에 부글부글 끓고 있는 똥물처럼 분노에 부글부글 끓고 있을 뿐이죠.
(중략)
국광이 열리던 과수원은 벌겋게 내장을 드러낸 지 수년인데
오는 사람 없고 멀리서 제주도 관광 비행기만 뜨지요.
겨울이면 하얗게 눈이 내려 똥통은 가려지고 없어집니다.
(하략)

<똥통> - 채호기
 
한 마디로 '똥통'같은 세상이다. '국광이 열리던 과수원'이 '벌겋게 내장을 드러'내어 농민의 한숨소리만 깊어지는 세상. 세상이 이리 '똥통'같은데도 '멀리서 제주도 관광 비행기'나 '뜨'는 한심한 세상. 헌데 혹독한 겨울의 시간일수록 '똥통'같은 시간은 순백의 '눈'에 가려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버리니, 참 어지간하다. 거 참, 1992년에 나온 시집에 보이는 세상과 2011년에 우리가 사는 세상은 왜 이다지도 변한 것 없이 닮아있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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