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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관심/시

[시] 그리운 우체국 - 류근

by 오후 세 시 2011. 9. 30.
상처적체질
카테고리 시/에세이 > 장르시
지은이 류근 (문학과지성사,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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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우체국 - 류근

옛사랑 여기서 얼마나 먼지
술에 취하면 나는 문득 우체국 불빛이 그리워지고
선량한 등불에 기대어 엽서 한 장 쓰고 싶으다
내게로 왔던 모든 이별들 위에
깨끗한 우표 한 장 붙여주고 싶으다
지금은 내 오랜 신열의 손금 위에도
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시절
낮은 지붕들 위로 별이 지나고
길에서 늙는 나무들은 우편배달부처럼
다시 못 만날 구름들을 향해 잎사귀를 흔든다 
흔들릴 때 스스로를 흔드는 것들은
비로소 얼마나 따사로운 틈새를 만드는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이별이 너무 흔해서
살아갈수록 내 가슴엔 강물이 깊어지고
돌아가야 할 시간은 철길 건너 세상의 변방에서
안개의 입자들처럼 몸을 허문다 옛사랑
추억 쪽에서 불어오는 노래의 흐린 풍경들 사이로
취한 내 눈시울조차 무게를 허문다 아아,
이제 그리운 것들은 모두 해가 지는 곳 어디쯤에서
그리운 제 별자리를 매달아두었으리라
차마 입술을 떠나지 못한 이름 하나 눈물겨워서
술에 취하면 나는 다시 우체국 불빛이 그리워지고
거기 서럽지 않은 등불에 기대어
엽서 한 장 사소하게 쓰고 싶으다
내게로 왔던 모든 이별들 위에
깨끗한 안부 한 잎 부쳐주고 싶으다






#01 가을인가봐?
  가을이긴 가을인가 보다. 나도 모르게 시집을 뒤적이고 있다. 내게 '좋은 시'란, 나를 현실 세계에서 잠시 잡아 빼내어 주거나, 나 이외의 세계가 흥건하게 머금고 있는 채도를 완전히 짜내서 흑백으로 만들어 주는 시이다. 물론 그런 시는 '나에게만 좋은 시'일테지만, 어떠랴, 내가 시 평론가가 아닌 이상에야 아무 상관 없지 않은가. 현실을 아주 망각하겠다는 건 아니다. 시가 어찌 현실을 떠날 수 있겠는가. 나를 현실 세계에서 잠시 잡아 빼낸다는 건, 그리고 나를 에워 싼 현실의 채도를 흑백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건, 다만 시를 통해 현실과 조금 멀리 떨어지고 싶다는 얘기일 뿐이고, 시를 통해 좀 더 나에게 가까워지고 싶단 얘기일 뿐이다. 어쨌든 가을이긴 가을인 모양이다. 좋은 시가 많이 보인다. 그리고 나도 누군가에게 엽서를 부치고도 싶다.


#02 그런 추억들
  추억들 중엔 그런 추억들이 있다. 나를 겸허하게 하는 추억, 나를 착하게 만드는 추억, 나를 바보처럼 순하게 만들어 주는 추억. 나는 술을 잘 마시지 못하지만 그래도 가끔 '술에 취하면' 그런 추억들에 '불'을 밝혀보곤 한다. 그럼 나는 문득 그 시절이 무척이나 '그리워지고', 그 시절을 향해 말을 걸고 싶어지고, '안부'도 묻고 싶어진다. 하지만 '흐린 풍경들'처럼 희미한 그 시절은 대답이 없다. 그래서 눈시울 위에 동글동글하게 맺히던 '눈물'은 결국 표면장력을 이기지 못하고 그 '무게를 허문다'. 흘러내린다. 바보, 천치처럼.


#03 흔들릴 때 스스로를 흔드는
  흔히 감정을 과도하게 분출하는 시는 매력이 없다고들 한다. 아마도 맞는 말이지 싶다. 그러나 독자까지 감정을 절제할 필요는 없다. "그 시절이 그립다"고 말하는 것보다 '우체국 불빛이 그리워지고'라거나, '내게로 왔던 모든 이별들 위에 / 깨끗한 우표 한 장 붙여주고 싶으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절제된 표현이다. 하지만 독자는 앞의 표현보다 뒤의 표현들로부터 더 강한 감정의 여운을 전달받는다. 그런 표현 앞에서 독자는 다리 힘을 풀고 주저앉아도 된다. 고로 '흔들릴 때 스스로를 흔드는' 건 독자가 나약해서가 아니라 독자가 독자 스스로에게 충실하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각설. 울어야 할 때 우는 건 지극히 자연스럽다. 추억해야 할 때 추억하는 것도, 무너져 내려야 할 때 무너져 내리는 것도 모두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건 나약하기보다는, 또 애처롭다기보다는, '따사'롭다. '틈'을 보인다는 건 허술한 게 아니라 '따사로운' 거다. 인간은 본래 추억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비져나오는 것들은 결코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도,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노랫말마따나 '혼자 추억하고 혼자 무너지'는 건 힘에 겨워도 '따사로운 틈새'를 만든다.

#04 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과거를 추억하는 건 전혀 부끄러운 게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감상에 젖는 불필요한 일 따위"라고 치부되어서도 안 된다. 추억은 죽지 않는다. 그건 여전히 내 속에 남아 끝없이 나를 팔딱이게 한다. 추억을 떠올리는 건 '오랜 신열의 손금 위에', 다시금 '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것처럼 내 실핏줄 위에 피가 돌게 한다.  그러니 추억해야 할 것들을 추억하자. 쌀쌀한 가을 위에 쓸쓸히 서서 흘려야 할 눈물을 흘리고 보듬어야 할 시간을 보듬으며 과거의 시간과 만나자.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이별이 너무 흔해서 / 살아갈수록' '가슴엔 강물이 깊어지고 / 돌아가야 할' 현재의 '시간은 철길 건너 세상의 변방에서 / 안개의 입자들처럼 몸을 허'물고 있지 않은가. 현재의 시간이 잠시 무너지고 과거의 시간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추억하자. 눈을 감고. 혹은 먼 곳을 널찍이 내다보며. 가을은 그러하기에 너무나도 좋은 계절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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