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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관심/시

[시] 기억의 집 - 이병률

by 오후 세 시 2011. 5. 26.
찬란
카테고리 시/에세이 > 장르시 > 현대시
지은이 이병률 (문학과지성사,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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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집 - 이병률

기억을 끌어다 놓았으니 산이 되겠지
바위산이 되겠지
여름과 가을 사이
그 산을 파내어 동굴을 만들고 기둥을 받쳐 깊숙한 움을 만들어
기억에게 중얼중얼 말을 걸다 보면 걸다 보면

시월과 십일월 사이
누구나 여기 들어와 살면 누구나 귀신인 것처럼 아늑하겠지
철새들은 동굴 입구를 지키고
집이 하나로는 영 좁고 모자란 나는
해가 밝으면 동굴을 파고 파고
그러면 기억은 자꾸자꾸 몰려와 따뜻해지겠지

그 집은 실뭉치 같기도 하고 모자 같기도 하며
어쩌면 심장 속 같기도 하여서
겁먹은 채로 손을 푹 하고 찔러 넣으면
보드랍고 따스한 온기가 잡혀와 아찔해진 마음은
곧 남이 되겠다고 남이 되겠다고 돌처럼 굳기도 하겠지

그 집은 오래된 약속 같아
들여다보고 살고도 싶은 여전히 저 건너일 것이므로
비와 태양 사이
저녁과 초저녁 사이
빛이 들어와 마을이 되겠지

그렇게 감옥에 갇혔으면 하고 생각한다
감옥에 갇혀 사전을 끌어안고 살거나
감옥이 갇혀 쓸데없는 이야기나 줄줄이 적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 기억하는 일 말고도
무슨 죄를 더 지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성냥을 긋거나
부정을 저지르거나
거짓멀이라도 해야 하는 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세상을 끊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또 태어나야 할 거라고 생각한다

<찬란>, 2010, 문학과지성사





#01. 기억들로 집을 세워,
  기억들은 오래전부터 모이기 시작했다. 그런 기억들이 모여서 '산'이 됐다. 그 기억은 무더기로 쌓인 산처럼 뒤죽박죽으로 방치되어 있다. 마음 속 어딘가에 산처럼 무더기로 방치됐던 기억들을 하나씩 하나씩 정리한다. 그건 마치 '기억에게 중얼중얼 말을' 거는 것과 같다. 기억들을 파내 정리하다 보면, 그 정리된 기억들이 처음엔 동굴 같다가 나중엔 집처럼 '아늑'해진다. 기억들을 몇 개 정리해 두자, 관련된 기억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새로 장만한 집에 가구들을 들여놓는 것처럼 기억들은 오밀조밀해지고 풍성해진다. 집이 가구들과 사람들로 차면 따뜻해지듯, '기억'들도 '자꾸자꾸 몰려와' '따뜻해'진다.


#02. 닿을 수 없는 마을.
  나는 "나만 아는 누군가"에 대한 기억들로 집을 한 채 지었다. 나는, 그 사람을 언제든 '들여다보고' 싶고, 또 그 사람과 언제까지나 함께 '살고도 싶'은데, 그 사람은 '여전히 저 건너'에 있다. 그러므로 '겁 먹은 채로 손을 푹 하고 찔러 넣'으면 '보드랍고 따스한 온기'를 느끼는데도 닿을 수 없는 장벽 때문에 이내 '남이 되겠다고' 다짐한다. 그 사람과 내가 마치 남남인듯 멀어지기 위해, 나는 내가 세운 그 기억의 집에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그러자 그 기억의 집은 내게서 조금씩 멀어져갔다. 그리고 기억의 집은 자신과 관련된 기억들을 내게서 하나씩 둘씩 가져가더니 하나의 '마을'이 되었다. 가까이 있어도 닿을 수 없는 마을. 그 마을에 '빛이 들'기라도 하면, 내 가슴은 너무나 아프다. 갈 수 없어 더욱 영롱한 기억의 마을이여.


#03. 완전히 단절되기를.
  그렇게 가슴 아프게 그 기억의 마을을 바라만 보고 있는 건 너무 힘들다. 그래서 차라리 그 기억의 마을과 아주 단절되기를 바란다. '죄'를 짓고 '감옥에 갇'힐 수 있다면, 그렇게 해서라도 그 영롱한 기억의 마을과 단절될 수 있다면, '무슨 죄'든 지을 각오가 되어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내가 살아 있는 한, 나는 그 기억의 마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인데. 감옥같이 세상과 단절된 곳에 간다한들 달라질 것은 없다. 그 기억의 마을은 닿을 순 없어도 결국 내가 만들어 놓은 내 마음속의 마을이 아니었던가. 그러므로 그 마을과 완전히 단절되려면 나를 버리는 수밖엔 없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아마도 세상을 등졌다가 '또' 다시 '태어나'는 것 외엔 달리 방도가 없을 것이다.


#04 생각만 한다.
  친구가 장난처럼 읊조렸다. '누군가에 대한 마음이 각별하기에 더더욱 그 사람과의 연을 끊으려 한다', 고. 내 간절한 마음을 알지 못해 내 진심을 받아들일 수 없는 그 사람에게, 사랑을 기대할 수는 없다. 농담으로 포장해 내 진심을 부분이나마 건네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이리라. 그것조차 할 자신이 없다면, 친구의 말마따나 아주 연을 끊고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없는 듯 사는 것이 나을 게다. 아마도 그게 '또' 다시 '태어나'는 것 아니겠나. 하지만 나는 용기가 없다. 그 사람 없는 곳에서 살 용기가 없다. 그러므로 죽을 용기도 없고,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없다고 독하게 마음먹을 용기 또한 없다. 그래서 나는, '세상을 끊'기 '위해서는 또 태어나야 할 거라고 생각'만 할 뿐이다. 그렇게 생각만 하며 그저 '빛이' 든 그 기억의 '마을'을 넋놓고 바라만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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