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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관심/시

[시] 늦가을을 살아도 늦가을을 - 문태준

by 오후 세 시 2011. 11. 9.
그늘의발달
카테고리 시/에세이 > 장르시
지은이 문태준 (문학과지성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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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을 살아도 늦가을을 - 문태준


늦가을을 살아도 늦가을을 몰랐지
늦가을을 제일로
숨겨놓은 곳은
늦가을 빈 원두막
살아도 살아갈 곳은
늦가을 빈 원두막
과일을 다 가져가고
비로소 그다음
잎사귀 지는 것의 끝을
혼자서
다 바라보는
저곳이
영리가 사는 곳
살아도 못 살아본 곳은
늦가을 빈 원두막
늦가을을 살아도 늦가을을 못 살았지


<그늘의 발달>, 2008, 문학과 지성사.




 #01 늦가을을 살아도 늦가을을 몰랐지 

  있어도 있는 줄 몰랐던 때가 있었다. 어떤 것에 대해서는 그랬다. 젊음이 그랬고 친구가 그랬고 사랑이 그랬다. 때로는 나이를 든다는 것이 그랬고 때로는 내 입에서 튀어나간 가시돋힌 말들이 그랬고 때로는 이별이 그랬다. 어떤 것은 내게 소중했었다. 어떤 것은 내게서 무심히 돋아나와 누군가를 상처 입혔었다. 그리고 또 어떤 것은 내 인생의 황금기에서 나를 내 삶의 끝자락 어디쯤인가로 끌어 내리기도 했었다. 나는 시간이 지난 후에야, 있었는데도 있었는 줄 몰랐던 것들을 볼 수 있었다. 소중한 것들이 사라진 빈 자리를, 나 때문에 상처입은 누군가의 붉은 환부를, 불빛이 사라지고 난 뒤 어두워진 내 삶의 그늘들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02  늦가을 빈 원두막

    모두 잃고 난 빈 자리에서 그런 깨달음을 얻는다. 잃고 나서 얻는다는 건 역설적이다. 소중한 것을 '제일로  / 숨겨놓은 곳은' 지금은 텅 비어버렸지만 한때 소중한 것이 머무르고 있던 거처(居處)이다. 황량해진 거처에서 풍족했던 지난 시절을 떠올리는 일은, 그곳에서 비로소 소중함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는 점에서는 다행이지만 한편으론 안타깝다. 이미 지나갔고, 이미 떠나갔고, 이미 비워져 버렸으므로, 그 거처에는 이제 아무도 살지 않는다. 빈 공간에는 실재하지 않는 지난 기억들만이 어지럽게 부유한다. 소중했던 그것은, 이제는 움켜쥐려 해도 잡히지 않고 보려고 해도 선명히 뵈지 않는다. 떠난 대상에 대한 그리움은 그토록 쓸쓸하다. 돌이킬 수 없으므로 더욱 그러하다.


#03 과일을 다 가져가고 비로소 그다음 잎사귀 지는 것의 끝을 혼자서 다 바라보는 저곳
 
   김현승은 기독교적 세계관 속에서 '아름다운 나무의 꽃의 시듦을 보시고 /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김현승, <눈물> 일부)라고 읊조렸다. 두 사람은 가을이라는 시간 안에서 이야기를 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한 사람은 아들을 잃은 비통함을 종교적 깨달음으로 승화시키고 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지난 삶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나직이 고백하고 있다. 한 사람은 모든 것이 시들고 난 뒤에 열리는 가을 열매에서 깨달음의 이유를 찾았고, 다른 한 사람은 열렸던 과일이 모두 비워지고 난 뒤의 늦가을 쓸쓸함에서 삶의 자취를 담담하게 되돌아보며 깨달음에 이르고 있다. 이렇게 보면 두 사람은 가을이라는 동일한 시간 안에서 열매 혹은 과일이라는 소재를 통해 깨달음에 도달한다는 유사점을 보여준다. 그런데 시가 전개되는 양상은 아주 다르다. 김현승은 '아름다운 나무의 꽃'과 '웃음'을 휘황찬란하지만 언젠간 소멸하는 부질없는 인세(人世)의 욕망으로 치부하는데, 그것을 거쳐감으로써 비로소 '열매'와 '눈물'이라는 깨달음에 다다를 수 있다고 말한다. 즉, 김현승은 필요('열매'와 '눈물'이라는 깨달음)와 필요를 위한 불필요('아름다운 나무의 꽃'과 '웃음')라는 이원론적인 시각으로 삶을 나누어 보고 있는 셈이다. 이는 본래 이원론적인 기독교적인 세계관과도 일맥상통한다. 한편 문태준에게 '과일'과 '잎사귀'는 깨달음 자체가 아니라 깨달음('늦가을을 살아도 늦가을을 못 살았'다는 깨달음)의 밑바탕이 되는 필연의 이유이다. 다시 말해, 문태준은 열렸던 '과일'이 비워지고, 피었던 '잎사귀'가 떨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가득 차 있음'과 '텅 비어버림'이라는 이분법적 시각을 '원두막'이라는 하나의 시어로 통합하고 있다. 김현승의 '열매'와 '눈물'이 '아름다운 나무의 꽃'과 '웃음' 뒤에 오는 것이므로 김현승 또한 삶을 하나로 통합한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시 전체 맥락에서는 '아름다운 나무의 꽃'과 '웃음'이 배척되고 있다. 문태준이 '참(fullness)'과 '빔(emptiness)'을 '원두막'으로 통합시키는 것과는 다르다. 문태준에게 '과일', '잎사귀', '원두막'은 욕망이 투영된 배척 대상이거나 진리가 숨겨진 보물상자같은 거창한 메타포가 아니라, 열리고 떨어지고, 피고 지고, 가득 차고 비워지는, 소소한 삶의 또다른 모습일 뿐이다.


#04. 늦가을을 살아도 늦가을을 못 살았지

  열리고 떨어지고, 피고 지고, 가득 차고 비워지고, 하는 이런 극단적인 이중성이 깃든 삶의 총체성은 비록 두 가지 성질을 띠기는 하나, 그 중 한 가지를 부정하거나 다른 한 가지를 옹호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늦가을을 살아도 늦가을을 못 살았'다는 고백은 그러므로 후회(배타)라기보다는 깨달음(통합)에 가깝다. 그 깨달음 속에 이미 좋았던 것에 대한 추억과 잘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좋았으므로 후회하고 후회하기 때문에 좋았다는 상호작용이 그 깨달음 속에서 통합적으로 이뤄진다. 그 깨달음의 시간을 '늦가을'로 바라보는 것은 적절해 보인다. '늦가을'이야말로 유채색으로 채워지고 물들었던 것들이 무채색으로 비워지고 바래지는 중도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늦가을'에는 모든 게 다 있다. 봄과 여름의 수고로움이 있고, 가을의 풍요로움이 있으며, 겨울의 황량함마저도 '늦가을'은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 중간 단계인 '늦가을'의 시간을 사계(四季)의 중심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식상하리만치 문학작품에서는 계절의 비유가 많다. 계절이 그만큼 흥망성쇠와 변화의 가시적 양상을 잘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사계절이 있는 나라에 태어난 것은 행운이'라고 한 누군가의 말은 그래서 맞는 말이다. 삶도, 인간관계도, 사랑도, 모두 사계절이 순환하는 것처럼 끊임없이 돌고 돈다. 그리고 그 순환 고리 속에 늘 '늦가을'의 시간이 있다. 지난 일을 떠올리고 후회하고 반성하고 추억하고, 곧 찾아올 혹독한 겨울의 시간을 견딜 준비를 하는 '늦가을'의 시간. 가혹한 시간이 다가오기 전에 잠시 다리를 펴고 앉아 한숨 고를 나의 '원두막'은 어디쯤일지. 길어진 가을. 그 '원두막'을 찾아가서 '혼자서' '잎사귀 지는 것의 끝을 다 바라보'는 것도 좋겠다. 계절도 곧 겨울이겠지만, 내 삶에도 곧 겨울이 찾아들 것 같으니 어디 한 번 그 끝자락을 지켜보자. 이미 떠난 대상에 대해 쓸쓸히 그리워 하고 미안해 하면서 나는 무엇을 깨닫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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