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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로그/다이어리

2011년 10월 4일. 잡담.

by 오후 세 시 2011. 10. 4.

#01. 사랑이 아직도...
  사랑이란 게 참 거지 같다. 내 사랑은 내가 열망할 땐 저 멀리 떨어져 있었고, 내가 돌보지 않을 땐 내 곁에 와서 서성였었다. 시소를 타듯 서로와 마주 앉았으면서도 우리는 한 치도 가까워지지 못했지. 우리는 어쩜 그렇게도 거릴 두고 앉아서 보다가 보았다가 보다가 보았다가 오르락 내리락 하며 단조로이 사랑 같지도 않은 사랑을 했던가. 내가 몸을 낮춰 사랑을 바라볼 때 사랑은 딴곳을 바라보며 경탄했고, 사랑이 몸을 낮춰 나를 바라볼 땐 내가 딴곳에 한눈 팔았지. 딴곳을 보다가 사랑을 보았다가 딴곳을 보다가 사랑을 보았다가. 그때마다 사랑은 반대로 나를 보았다가 딴곳을 보다가 나를 보았다가 딴곳을 보다가. 정끝별 시인의 말마따나 '가지를 사이에 두고 / 꽃만 보며 SeeSaw SeeSaw' 우리는 허물 수 없는 장벽을 사이에 두고 무엇을 바랐길래 보다가 보았다 무수히 반복을 했나. 사랑이란 게 껌처럼 단물 빠질 때까지 짝짝 씹다가 뱉어 버릴 수 있는 거라면 얼마나 좋으랴만, 사랑이란 게 참 그렇지가 않아서 습관성 편두통처럼 시도때도없이 지끈지끈 남아 나를 불편하게 한다.


#02. 판도라의 상자, 그 불편한 진실

  술취한 내게 내어주던 무릎, 내 머리칼을 쓸어넘기던 손길, 나를 향한 마음인줄 알았던 온갖 것들이, 알고 보니 오해였다. 오해의 싹은 그렇게 돋아났었지. 사랑이 나를 쓰다듬고 사랑이 날 위한 공간을 내어주면서. 나는 그 작은 오해들을 모아 사랑으로 위장해 길렀다. 오해인 줄 모르고, 그게 사랑으로 위장하는 것인 줄도 모르고, 그게 진심인 줄로만 알고. 사랑의 가면을 씌워놓고 나는 그 오해들을 참 열심히도 기르고 돌봤다. 겨우 다스렸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며 던져지던 돌멩이. 내 마음은 돌팔매에 멍들고 터지고 찢어졌지. 선뜩하게 멍울져 나와 낭자하던 핏덩이를 나는 허물 수 없는 장벽에 가로막힌 사랑의 상처라 여겼다. 지금 되돌아 보면 오해들은 그 이유 모를 핏방울들을 마시며 자랐다. 나는 그때를 힘들어도 감내해야 하는 시절이라 여겼다. 사랑하려면 그래야만 하는 것이라고, 천치같은 생각을, 했다. 술에 취한 모두에게 내어주던 무릎, 모두의 머리칼을 쓸어넘기던 손길, 나만을 향한 마음라고 믿었던 것이 실은 만인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오해는 결실을 맺었다. 오해의 싹이 자랄만큼 자라서 열매를 맺자 사랑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되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불편한 진실과 직면하던 그때 나는 최후의 눈물을 흘리며 사랑이라 여겼던 오해를 뿌리 채 뽑아 버렸어야 했는데, 상처난 내 마음은 등신같게도 도저히 그것을 허락하지 못했다. 수년을 길러온 사랑이었는데, 그것이 설령 오해였다 할지라도, 그 줄기를 단칼에 꺾어 버리는 건 영 내키지 않았었던 거였다.

#03. 얽힌 것을 풀면,
  둘이서 좋아 죽겠으면서도 둘 사이를 가로막은 현실적인 한계 때문에 까치발을 하고 서로를 바라보기만 해야 했던 것이 내가 알고 있던 우리의 사랑이었다. <혼불>의 '강모'와 '강실'이의 사랑보다는 덜 위험하고, <사랑을 믿어요>의 '우진'과 '윤희'의 사랑보다는 더 위험한 사랑. 하지만 이제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으니 우리의 사랑은 재해석되어야 한다. 이미 빛바랜 사랑에 반짝이는 빛이 깃들 리 없으므로 나는 이제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면 안 된다. 그리고 나는 이제 오해였던 사랑을 한 올 한 올 풀어내야 한다. 그러나 풀어도 풀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이 엿같은 사랑. 모두 풀어서 다시 엮어야 사랑이 아니었다고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동안 나는 이 사랑을 너무 단단히 짜 놓았었나 보다. 아니면 내 마음을 너무 견고하게 쌓아 놨었는지도. 그래도 얽힌 걸 모두 풀면, 사랑이 오해였다고 인정하면, 사랑을 향한 내 마음의 불씨를 꺼뜨릴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까?

#04. 이게 사람의 마음이려나.
  하지만 어째 이 사랑이, 아니 사랑을 향한 내 마음이 쉬이 풀리질 않는다. 때론 풀고 싶지 않기도 하다. 나는 왜 그 상자를 열었던가. 왜 불필요한 진실들을 꺼내어 놓고 집요하게 추궁했었던가. 이 지경까지 오니, 나를 사랑했었다는 사랑의 말도 도통 믿겨지질 않는다. 시소 위에서 내가 딴 곳에 한눈 팔 때, 사랑은 나를 바라보기는 했었나. 술취한 내게 내어주던 무릎, 그 무릎을 베고 잠이 들던 내 머리칼을 쓸어넘기던 손길. 그것이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것이었었다면, 도대체 사랑은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 정말 나를 사랑하기는 했었나. 어린애처럼 보채는 내게 "그때는 너를 사랑했었다"고 꼬마 어르듯 사탕을 물려준 건 아니었었나. 얽힌 걸 풀어야 하는데 풀기가 싫다. 그냥 그때 우리는 서로 엇갈리고 있었고, 서로를 바라볼 수 있게 됐을 즈음엔 우리 사이를 가로막은 현실 장벽 때문에 바라보기만 해야 했었고, 그러다 서로를 포기해야만 했었다고 믿고 싶다. 아름답게 치장해 둔 추억이 변색되는 것을 보고 싶지가 않다. 이게 다 사람의 마음이려나.


+ 남들은 봐도 모르는 얘기. 안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얘기. 이해한다고 해도 모른 척 해 주어야 하는, 뭐 그런 이야기.
+ 오래 전에 지난 사랑을 눈에 보이게 정리하는 일. 근데 이렇게 정리하다 보면 어쩐지 사랑을 이해하게 될 것만 같아. 그러다 보면 사그러든 불씨가 다시 살아날 것도 같아. 그러니까 정리 잘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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