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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관심/시

[시] 바다의 탯줄 - 이한종

by 오후 세 시 2011. 2. 24.
호사비오리
카테고리 시/에세이 > 장르시 > 현대시
지은이 이한종 (북인,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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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탯줄 - 이한종


내가 섬을 떠나던 날, 남산포에 비가 내렸다 비는 울고 또 울고, 파도가 바위의 등을 만지다 주저앉는다 굴적바위 하나 배에 올랐다 뱃전에도 굴적이 더덕더덕 붙어 있다 배가 남산포를 떠났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맹세도 함께 싣고 떠났다 물결이 굴적 모서리에 베어 너덜너덜하다 배는 찢어진 바다의 시접을 한 땀 한 땀 꿰어갔다 비는 울고 또 울고 또 울고, 그 울음소리 너무 낮아 화통 끝에 그을음뿐, 오늘도 굴적바위는 화농으로 벌어져 바다의 가슴을 긋고 다닌다 오늘도 남산포는 나를 부른다 꿈틀꿈틀 바다의 탯줄을 당기고 있다

<호사비오리>, 2001, 북인.




#01. 남산포를 떠남

  아무렇지 않은 듯한 헤어짐도 어쨌든 헤어짐이다. 그러므로 상처가 많다. 그런데 그 상처는 소중히 여기던 것과 떨어짐으로써 생긴 상처다. 예전의 안 좋았던 기억은 상처라 할 수 없다. 그건 그냥 투정이었다. 지금의 상처는 모두 서로를 떠남으로써 패인 것이다.


#02. 찢어진 바다의 시접
  시접이 너덜너덜하게 찢어져 버렸다. 다른 누가 찢은 게 아니다. 그건 내가 스스로 찢은 것이었다. 그 시접, 내가 찢은 거라 참 슬프다. 그 사람의 온전했던 일상까지 찢겨졌을 거라 생각하니 더욱 더 슬프다. 아무렇지 않은 듯해 보이는 헤어짐같아 보였어도, 나와 그 사람 모두 붙어있다가 떨어지면서 생긴 그 찢어짐의 상처를, 남들 모르게 울음 삼키며 꿰매어 갔을 것이다.


#03. 굴적바위는 화농으로 벌어져
  좋은 기억들이 많다. 더덕더덕 붙어있진 않아도 가지런히 남겨져 있는 기억들이다. 간혹은 그런 좋은 기억들로부터 상처를 덧입는다. 행복했던 기억이 외려 아픔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좋은 기억이 긋고 지나간 상처는 한층 더 깊게 곪았다가 터진다.


#04. 바다의 탯줄
  그러나 둘을 다시 당기는 탯줄이 없다. 아직은 그렇다. 영영 없을 수도 있고, 어느 땐가 한 번 쯤은 그런 탯줄을 느낄 날이 올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상처를 보듬기에도 바쁘다.


#05. 울음소리 너무 낮아 화통 끝에 그을음 뿐
  나이가 드니, 화통 끝에 남는 그을음같은 슬픔만 그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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