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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의 본질인 아름다움과 깨끗함, 연약함은 순수의 내부에 존재하고 있다. 반면 순수의 본질과 배타적인 것들은 순수의 바깥에서 순수의 본질을 욕망함으로써 순수를 더럽히고 부서뜨리려 한다. 따라서 순수를 지켜내려면 순수를 겨냥한 외부의 폭압을 막아내야 하는데 그 때문에 외부로부터의 폭력을 고스란히 맨몸 그대로 받아내야만 하는 상황과 맞딱뜨리게 된다. 물론 폭력에 대항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외부의 폭력에 대항하게 되면, 그 순간 순수의 가치는 짓이겨지고 무참히 짓밟히게 된다. 왜냐하면, 폭력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막아내거나 물리칠 수 있는 또다른 폭력이 반드시 필요하게 되기 때문이다. 즉, 순수를 지키려면 폭력을 개입시킬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되면 순수의 가치는 훼손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외부로부터의 폭력에 같은 폭력으로 맞서는 것은 순수를 지키기 위한 정당방위다, 라고 말할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폭력을 가담시킨다는 것에는 상대방을 부서뜨리고 파괴하겠다는 욕망이 전제되어 있다.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목적에 위배되는 행위도 불사하겠다는 이 해괴망측한 아이디어는 그야말로 표리부동이 아닌가.
'화살통 같은 입을 세우고 달려오'는 '멧돼지'로부터 '속옷만 입은' 자신의 '아이'를 지켜내기 위해 아버지는 '몽둥이'와 '도끼'를 손에 쥔다. 그리고 외부로부터 맹렬히 돌진해 들어오는 폭력에 똑같은 폭력의 방식으로 대응한다. 그러나 순수를 지키기 위해 '도끼'로 그 외부의 폭력적 대상을 '여러 번 찍고, 또 찍고' 했을 때, 순수는 과연 지켜졌었나. 아니다. 순수는 '피투성이'가 되어 '무참'하게 부서져 버리고 말았다. 외부의 폭압으로부터 순수를 지키겠다는 명목 아래, 폭력을 폭력으로 대하는 순간 순수의 가치는 철저하게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순수를 지키기 위해서는 순수를 포기해야 한다는 이 모순. 순수를 지키기 위해서는 순수가 아닌 폭력으로 무장할 수밖에 없다는 이 아이러니. 그것이 바로 역전이다. 순수를 지키려 함이 역으로 순수를 짓이겨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순수의 가치를 지향한다면, 순수를 지키고자 했다면 폭력으로 대응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폭력으로 대하지 않았다면, 역전의 사태에도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한 사람을 못잡아 먹어 안달이던 사람들이 그 사람을 조문하기 위해 온 모습, 과 한 사람을 사랑한다 부르짖으면서 그 사람을 조문하러 온 사람들을 막아서던 또 다른 사람들의 모습, 과 한 사람을 사랑했다 말하면서 그 사람에게 전달된 화환을 부서뜨리고 밟아대던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의 모습. 이들은 내게 모두 모순이었다. 자신들의 가치를 이야기하려 하면서 자신들이 지닌 가치와는 불일치하고 상반되는 행동들을 서슴지 않던 그들은 자신들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할 자격이 없다.
오로지 슬픈 것은 자신이 지닌 가치가 옳은 것이라 믿고 그것을 지켜내기 위해 외부의 폭압을 맨몸 그대로 받아낸 한 사람과 그 사람의 죽음뿐이다. 나는 궁금하다. 가치는 생명과 바꿀 만큼 가치가 있는가. 한 사람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생각한다. 슬프게도 어떤 가치는 생명과 맞바꿀 만큼 가치가 있다. 그래서 가치 있는 것을 '가치'라 부르는 것일는지도 모르겠다. 그 분의 순수한 '가치'에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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