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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 A
그는 데미안인가, 싱클레어인가. 다중인격의 성장 자서전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성장하면서 데미안을 만나 성숙해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처음에 헤세는 이 작품을 익명으로 출판했다고 한다. '에밀 싱클레어의 청년시절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은 『데미안』의 작가가 에밀 싱클레어라고 알고 있었단다.
내가 『데미안』을 처음 접했을 때가 고등학생 때였는데, 그 때는 이 작품이 에밀 싱클레어의 독특한 성장 소설 쯤 된다고 생각을 했었다. 원래 성장 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는 소설들을 좋아해서 별 막힘 없이 소설을 읽어나갔던 기억이 있다. 싱클레어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들이 참 긴장감 넘치고 재미있었더랬다.
이 참에 잠시 줄거리를 소개한다. 읽으신 분들은 패스하셔도 상관없다.
『데미안』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개 선과 악의 대립, 밝음과 어둠의 대립을 통한 자아의 성장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고 보는 것이 보통이다. 행복이 충만한 가정이 선이라면 프란츠 크로머로 대표되는 바깥 세계는 악인 셈이다. 그런데 이런 선과 악의 세계가 데미안을 만나게 되면서 혼돈스러워지게 된다. 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성경 속의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사실은 카인이 악인이고 아벨이 선인이라는 것인데, 데미안은 질문을 통해 그것을 뒤엎는다. 즉, 카인이 어째서 악인이고, 아벨이 어째서 선인인가를 되물음으로써 그 둘의 관계가 역전될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여기서 데미안은 어떤 명제만을 던질 뿐,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이 특이하다. 그리고 카인과 아벨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파생된 선과 악, 밝음과 어둠의 혼돈스러움은 압락삭스를 향해 날아가는 새로 다시 함축된다. 기존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새로운 세계에 진입할 수 있다는 데미안의 말은 역시 명제의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싱클레어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해결해 나가는데 도움을 주는 사람이 피스토리우스이다.
선은 항상 선이고 악은 항상 악인가. 싱클레어가 얻은 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선과 악이 대립되는 세계는 밝음의 세계이다. 잣대를 가지고 선과 악을 엄격히 구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말 그대로 선명하게 밝은 세계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세계가 밝은 이유는 사유가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알에서 깨어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인 것이다. 싱클레어는 '그렇지 않다'라는 답을 얻음과 동시에 밝음과 어둠이 공존하는 세계로 진입한다. 알을 깨고 나온 것이고 사유가 성장하게 된 것이며, 이제 선이 악일수 있고 악이 선일 수 있는 혼돈의 세계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평화로운 세계에서 갑자기 전쟁이 터진 것도 그런 것과 관련이 있다. 기존의 진실이 파괴되면 당연히 혼란이 올 수 밖에 없으니까. 그러나 그것을 통해 싱클레어는 성장한다. 그리고 성장하게 된 싱클레어 곁에서 데미안은 떠난다.
『데미안』을 여러 번 읽으면서 일반적인 견해를 따랐다. 선과 악, 밝음과 어둠. 기존 질서의 잣대를 파괴하고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을 통한 성장. 명징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중인격, 혹은 다중인격을 다룬 스릴러 영화들을 다수 접하는 와중에 『데미안』을 다시 읽게 되었다가, 『데미안』을 다중인격을 다룬 작품으로 다시 읽게 됐다. 그 느낀 바를 간략히 정리해 봤다.
소설 속에 보면 크로머가 데미안에게 호되게 당하고 난 뒤 싱클레어를 보면 쭈뼛거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크로머를 굴복시킨 것이 실존하는 데미안이 아니라 싱클레어의 또 다른 내면인 데미안이기 때문이다. 즉, 싱클레어에게는 데미안이 크로머를 굴복시킨 것으로 생각되지만, 크로머에게는 새로운 인격체의 싱클레어가 자신을 굴복시킨 것이 되는 것이다.
학교 수업 시간에 싱클레어는 내면 세계로 깊이 빠져드는 데미안을 발견하곤 한다. 그것은 데미안으로 상징되는 인격과 싱클레어의 기존 인격이 드러나고 침잠하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김나지움에 가게 된 싱클레어는 한동안 데미안을 만나지 못한다. 데미안으로 상징되는 인격이 잠시 동안 휴면기에 접어든 것이다. 그러나 싱클레어는 언젠가는 다시 데미안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짐작한다. 싱클레어가 다시 데미안과 연락을 취하게 되는 것은 베아트리체를 그린 그림 속에서 데미안의 모습을 떠올리고, 꿈 속에서 본 새를 그림으로 그리고 난 뒤이다. 그러나 데미안이 직접 표면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간단한 힌트만을 던져줄 뿐이다. 아직 데미안으로서의 인격은 잠재한 상태인 것이다.
데미안과 본격적으로 다시 대면하게 되는 시기는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이다. 그리고 이 때 싱클레어의 내면에는 또 다른 인격이 서서히 고개를 든다. 바로 에바 부인. 세 인격이 서로 만나서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는 과정은 서로 다른 인격들이 하나의 인격체를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싱클레어가 내면의 연약함, 완고함 등을 상징한다면 데미안은 내면의 강인함, 자유스러움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겠다. 마치 ≪파이트 클럽≫의 에드워드 노튼과 브래드 피트의 관계라고나 할까? 그리고 싱클레어와 데미안이 내면의 남성성을 상징한다면 에바 부인은 내면의 여성성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겠다. 싱클레어의 성이 남성이기 때문에 남성성이 조금 더 강한 것(남성 인격이 둘이니까)으로 봐야 하는 것이다. 남성에게도 여성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싱클레어의 경우엔 그 여성성이 에바 부인의 형상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데미안이 이전에 이야기했던 알 속의 새와 압락사스는 이러한 인격들의 만남에 관한 상징이다. 싱클레어는 알 속의 새에 불과하다. 이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알이라는 기존 세계를 깨뜨려야만 한다. 그래야만 새로운 세계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알을 깨뜨리고 압락사스를 향해 날아가는 과정을 바로 각성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의 각성이란 내면 속의 인격들을 인정하고 통합체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 각성을 위해서는 알을 깨뜨려야 하는 파괴의식이 필요하다.
평화로운 세계에 갑자기 전쟁이 터진다는 설정과 싱클레어, 데미안, 에바 부인이 오랜 날들동안 가졌던 대화의 끝무렵에 전쟁이 시작된다는 것은 그 시점에서 매우 적절한 은유라고 생각된다. 세 인격은 많은 교감을 나누었고, 이제는 파괴를 통해 알을 깨고 하나로 통합되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그리고 싱클레어는 부상을 입는다. 무엇인가를 깨고 각성하기 위해 상처를 입는 것은 불가결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싱클레어는 잠결에 데미안과 재회하여 에바 부인이 전하는 키스를 받는다. 세 인격체가 하나로 통합되는 아름다운 순간이라 할 수 있다. 연약함과 강인함, 완고함과 자유스러움, 남성성과 여성성이 한데 모여 조화롭게 하나의 인격체를 만드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는지.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곁에 데미안이 없다는 것이 싱클레어에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점과 앞으로 데미안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싱클레어가 생각하는 점 등은 싱클레어의 각성이 온전히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싱클레어가 앞으로 데미안과 에바 부인을 만날 수 없는 것은 어폐라고도 할 수 있겠다. 싱클레어는 싱클레어이자 데미안이며 동시에 에바 부인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싱클레어가 아니고 데미안이 아니고 에바 부인이 아니기도 하다. 이것은 새로운 인격체의 완성이라고 봐야한다. 표면적인 에밀 싱클레어는 이로써 완전히 성장하게 된 것이다.
책은 읽을 때마다 독자를 새로운 곳으로 이끈다. 특히 내게 『데미안』이라는 소설은 더욱 그런 작품이었다. 이제 내게 『데미안』은 싱클레어의 내면 속 인격들이 서로 만나서 표면적인 싱클레어의 시야에 들어오는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서로의 의견을 조정해나가면서 하나의 온전한 인격체로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사실 우리 모두가 그런 과정을 거쳐나가면서 성장하지 않았나.
글 풀어내는 솜씨가 없어서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모두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모쪼록 조금은 신선한 이야기가 되었길 바랄 뿐. 더불어 아직 『데미안』을 읽지 않으신 분들은 꼭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해 드린다. 다양한 해석을 낳을 수 있기 때문에 독자들에게는 매우 영양가있는 작품일 것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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