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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더미/내가 읽은 책

[책/수필] 끌림 - 이병률

by 오후 세 시 2009. 3. 1.
끌림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이병률 (랜덤하우스코리아,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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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 AA

  마지막 장에 질서정연하게 인쇄된 발행일자와 발행인, 편집인, 펴낸 곳 등까지 모두 읽고 난 뒤, 책의 뒷면을 덮으며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책을 읽는 동안 가빠졌던 숨을 가지런히 고르느라 그런 탓도 있었지만, 지면들을 넘기면서 가졌던 다짐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더 그러했던 것 같다. 책의 뒷면을 덮고 한숨을 내쉬며 후회랄까, 아쉬움이랄까 그런 것들이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며칠 전부터 사진과 글이 함께 실린 산문집이 심하게 당겼다. 나를 가두고 있는 장소와 시간으로부터 정신적으로나마 벗어나고 싶다는 욕구가 맘 속 한 구석에서 솟구쳤기 때문이었다. 그런 책을 찾기 위해 도서관에서 아둥바둥대다가 무심코 최갑수 시인의 『당분간은 나를 위해서만』이라는 에세이집을 뽑아들게 되었는데, 그 책은 당시의 내 정서와 많이 달라서 20여쪽을 읽어가다가 조용히 덮었다. 정체된-제목에서도 느껴지는-느낌이 나를 더욱 의기소침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요 며칠 간의 나는 폭발하기 직전으로 다다르고 있었다. 내면으로 꾸역 꾸역 너무 많은 것들을 밀어넣어서 더 이상 밀어넣을 데가 없었다. 밀어넣어진 것들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고 곧 터져버릴 수밖에 없는 상태에 이르고 있었다. 읽던 책을 덮은 손은 뭔가 불안해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지푸라기도 잡아야 그 불안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다가 구세주가 나타났다. 친구가 추천해 준 이병률 시인의 『끌림』이라는 책이 바로 그 구세주. 아마 요 며칠 동안-4일 정도이지만-은 이 책만 읽었다.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 같다. 공부하고 수업 듣고, 밥 먹고, 잠 잘 때 빼곤 이 책을 읽었다. 참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책이었다.

  이병률 시인이 1994년부터 2005년까지 여행을 하며 찍었던 사진들과 끄적였던 글들을 엮은 책이었는데, 시인의 자유분방함과 부드러운 입담이 참 좋았다.

  이 책에는 '차례' 혹은 '순서'가 없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되진 않는다. 어디든 펼쳐놓고 읽기 시작하면 그 뿐이니까. 물론 나는 순서를 지켜가면서 책을 읽어나가는 강박증을 갖고 있긴 했지만, 이 책은 그런 강박증을 필요없게 만드는 재주가 있더라. 책 말미로 가면 책의 '차례'라고 할 만한 것이 있기는 한데 쪽수가 적혀있질 않으니 '차례'라고 부를 순 없을 것 같다. 그 부분은 그냥 책을 모두 읽고 난 뒤 책을 읽어나가던 시간을 떠올리듯 더듬어 보면 좋을 그런 추억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나에겐 그런 느낌이었다.

  대략 4일 정도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많이 안정되었다. 터질 것 같던 것들이 분출되지 않고 잔잔해졌다. 그러더니 그것들이 소화가 되더라. 내면화가 된다고나 할까? 꾸역꾸역 넣기만 하던 것들이 맘 속에서 스스로 자리를 잡아가는 것이었다. 인정하고 이해할 수 있는 용기를 이 책을 통해 얻었던 것 같다. 하여 지면들을 넘겨가면서 스스로 그런 다짐을 했다. 천천히 그리고 오래 읽어나가자. 지면을 넘길 수록 더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하지만 결국 그 다짐은 지키지 못했다.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책의 뒷면을 덮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던 건 그래서였다. '이제 이 책을 반납해야만 한다'는 아쉬움과 '왜 이렇게 빨리 읽어 버린 것일까'하는 후회가 밀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조금 더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만, 지금은 읽다가 너무나 감명깊어서 한동안 책장을 넘기지 못했던 아래 부분으로 모든 것을 대신하고 싶다.

  "잘못하면 스텝이 엉키죠. 하지만 그대로 추면 돼요. 스텝이 엉키면 그게 바로 탱고지요." 시인이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갔을 때 탱고가 배우고 싶어서 탱고 학원에 다닌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날 강사가 세실이라는 여인과 시인을 짝 짓고 탱고를 춰 보라고 했단다. 그 날 시인은 세실이라는 여인의 발을 많이도 밟았었나 보다. 시인이 어깨를 으쓱이며 두 손을 들어보이자 강사가 벽면에 붙어있는 영화 ≪여인의 향기≫ 포스터를 가리켰다고 한다. 그 벽면에 위의 문구가 쓰여 있었다고. 그런데 어쩐지 그 다음부터는 탱고를 추는 행위가 참 로맨틱하게 느껴지더란다. 포스터 위의 문구가 이렇게 읽혔다고 한다. "사랑을 하면 마음이 엉키죠. 하지만 그대로 두면 돼요. 마음이 엉키면 그게 바로 사랑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