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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관심/등산

[등산] 북한산 백운대

by 오후 세 시 2011. 11. 2.


  1년간 준비했던 시험이 끝났다. 시험 하나를 보기 위해 1년을 투자해야 한다는 건 정말 거지깽깽이같다. 열아홉 살 때 수능성적이 자그마치 40점이 떨어져서 절망에 꿇어 앉아 수능시험 거지같다고 징징대던 때도 있었지만, 임용고사는 수능시험과는 완전히 다르다. 열아홉 살 때에는 재수를 포기하고 그냥 점수 맞춰서 대학에 가면 됐었지만, 임용고사는 그럴 수 없으니까 1년 공부해서 시험을 보고 그 해에 못 붙으면 다시 또 1년을 투자해야만 한다. 재수(혹은 삼수, 사수, 오수...)를 포기하겠다는 건 임용고사를 포기하겠다는 말과 다름없다. 그런데 지난 1년 동안 쏟아부은 게 아까워서 포기하는 게 쉽지가 않다. 1년 동안 한 공부에다가 돌아오는 해에 좀 더 열심히 공부를 하면 내공이 깊어질거야. 그럼 다음해 시험을 노려볼만하다. 이런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그냥 자동으로 재수, 삼수, 사수... 쭉 가는거지. 사람이 피가 마른다. 나는 물론 정신줄 놓는 경우가 다반사라 그냥 콱 놀아버리지만.

  시험이 끝나면, 머릿속은 어질러진 책장같다. 정리하려니 한숨부터 나오고, 막상 손을 대보려 하는데 뭐부터 정리를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고, 뭐 그렇다. 이럴 땐 그냥 지칠 때까지 놀고 놀고 또 노는 게 정답인 것 같은데, 그게 또 맘 편히 놀아지는 게 아니더라. 시험 보기 전에 함께 공부하던 아이들과 지나가는 말처럼 시험 끝나면 등산 한 번 가자고 했었다. 그래서 어쩌다 보니 오늘 등산을 가게 됐다.



  오전에 북한산 입구를 향해 출발했다. 아침 겸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북한산 입구에 먹을 게 마땅찮아서 애들한테 짜증 좀 부렸다. 사실 애들한테 짜증난 건 아니고, 김밥 네 줄이 팔천 원 한다길래 카드로 긁겠다니까, 팔천 원 밖에 안 하는 김밥을 무슨 카드로 계산하려고 하냐며 안 팔겠다고 말하시던 할아버지한테 짜증이 난 거였는데... 김밥이 이천 원 하는 것에도 살짝 심사가 뒤틀린 참이었는데, 안 팔겠다고 역정을 내시니까 속좁은 내가 짜증이 나겠어 안 나겠어. 어쨌든 편의점에 가서 현금 뽑아서 당당히 두 줄 사다가 나 혼자 쳐묵쳐묵했다.


  북한산성 탐방지원센터에서 출발한 우리는 '서암문-원효암-원효봉'쪽 길은 두고, '대서문-용암사'쪽으로 길을 잡았다. 실은 명환이 녀석이 가다가 개연폭포를 보고 가야한다고 해서 대서문 방향으로 발길을 튼 것인데, 이 자식들이 얼마나 빠르게 산을 오르던지, 결국 보고 가야 된다던 개연폭포는 보지도 못했다. 나는 좀 천천히 걷고 싶었는데... 명환이와 평소에 산 좋아한다는 말을 경쟁적으로 자주 한 적이 있었다. 나 산 타는 거 좋아해. 나도 산 타는 거 좋아해. 너 그 산 가봤어? 난 가봤는데. 그 산 진짜 힘들어. 뭐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 그런데 막상 산에 같이 오니까 이놈이 마음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한 게 아닌가 한다. "쟤보단 지치지 말고 빨리 오르면서 산을 잘 탄다는 인상을 심어줘야징." 여하튼 너 때문에 개연폭포는 보지도 못하고 괜히 길만 돌아갔잖아, 임마.



  대서문 가는 길. 이때까지만 해도 천천히 걸었었다. 아마 길이 평탄해서 경쟁심이 발동하기 전이었던 것 같다. 정말 이 때는 셋이 나란히 걸으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 도란도란 나누면서 걸었는데, 경사 시작되면서부터 갑자기 말 없어지고 거친 숨소리만 헉헉. 이때가 단풍이 절정이었댔는데, 단풍구경은 하지도 못하고 산 타느라 정신만 쏙 뺐다.



  이 못생긴 노무 시키들이 산행 초반에 미친듯이 앞으로 치고 나간 재형이와 명환이. 특히 키 큰 명환이놈. 그래도 재형이는 중간에 청바지 때문에 땀 차서 나랑 페이스를 비슷하게 해서 갔었지. 이 사진은 대서문 지나고 용암사 나오긴 전에 찍은 사진이다. 이때부터 경사가 시작됐었는데 여기서 사진을 찍어주길 잘한 듯. 백운대 도착하기 전까지는 얘네들을 다시 찍을 수 없었다. 아, 재형이는 나랑 페이스 비슷하게 맞춘 뒤에는 사진 몇 장 찍어줬지. 명환이가 나중에 자기 사진은 왜 별로 없냐며 서운해해서 좀 미안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명환이가 우리를 따돌리고 먼저 올라갔기 때문이었어. 안 미안해. 암튼 이때부터 경사 시작.



  정말 정상 올라가기 전까지 사진 많이 찍으려고 했는데, 애들이 기다릴까봐 많이 참고 산행에만 집중했다. 이 사진은 그나마 몇 장 찍은 사진 중에 단풍나무가 찍힌 사진. 북한산 빨간 단풍 천지였다는데 나중에 찍은 사진들 보니 글쎄 그 빨간 단풍 찍은 사진이 하나도 없더라. 어휴.



  애들은 먼저 올라가고 사진 찍어줄 사람은 없고, 결국 셀카질. 요즘 앞쪽 머리카락이 거의 윗입술까지 내려와 있다 보니 머리카락을 타고 내려오는 땀이 자꾸만 안경에 덕지덕지 묻었다. 그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푹 파인 못생긴 이마를 공개. 스포츠 타월 양도해준 재형이, 고마워.


  위문을 지나 백운대 오르는 도중에 만경대를 배경으로 두 녀석을 찍었다. 좋댄다. 힘들지 않은 척 하느라 고생했어, 얘들아.



  저 뒤에 보이는 것이 만경대이다. 진짜 사진 찍으려고 저기 걸터앉는데 심장 떨리고 다리 후들거려서 죽는 줄 알았다. 무서워서. 잘 보면 내 오른손에 힘이 엄청 들어가 있다. 애들은 안 무서운 척하고 웃으면서 찍었는데, 나는 무서워서 어색한 미소.



  백운대 정상 근처. 뒤로 보이는 건 인수봉. 전라도 순천 사나이 양재형 군. 말할 때 특징으로 "형, 어쩌구 저쩌구... 어?(되묻는 거임, 이해했어? 이런 의미)"와 팔꿈치 아래로 대화상태를 툭툭 건드리는 습관 있음. 문자하는 것보다 전화하는 걸 좋아함. 보기완 다르게 순정남. 에슐리를 무지 좋아함. 반찬 투정한다고 나를 자꾸 갈굼. 하지만 얘는 나를 좋아함. ㅋㅋㅋ



  백운대 정상 근처. 강원도 속초 사나이 이명환. 키가 큼. 187? 188? 지가 서태웅 키라고 자랑스러워 함. 농구는 나보다 못 함. 나랑은 맨날 티격태격하지만, 거의 나한테 갈굼을 당함. 순박함. 고집 셈. 철학 좋아함. 평소에 말을 잘 안 함. 여자 사람 있을 땐 말을 많이 하는 습관이 있음. 말할 때  "어.., 음...,"이라는 간투사 사용이 잦고, 무언가를 설명할 때, "어, 그러니까 ○○라는 건 말이야~"라는 고정적인 대화 패턴을 사용함. 새벽에 곧잘 일어날 정도로 부지런하지만 약간 할아버지 같은 면이 있음. 바지 올려입는 것만 제발 고쳤으면 좋겠음. 얘는 재형이가 나만 좋아한다고 질투함(스스로는 질투가 아니라고 항변 중). ㅋㅋㅋㅋ



  백운대 정상 근처. 나. 커피 좋아함. 반찬 투정 쬐금 함. 고소공포증 있음. 습관성 두통에 시달림. 두통 오면 피하는 게 상책.



  백운대 정상에서 찍은 동영상이다. 서울이 얼마나 더러운 대기에 휩싸여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진짜 무슨 사막도 아니고, 하늘색이랑 서울 위를 덮은 대기의 색이랑 어떻게 저리 뙇! 구분이 되는 것이냐고. 암튼 서울 더러움.




  백운대 정상 찍고 내려오던 길에 있던 인수대피소. 여기서 2000원 짜리 물을 사서 마셨는데 진짜 시원했다. 숙박 가능한가?


   하산하는 길에는 다들 다리가 풀려서 제동을 못 걸고 앞으로 넘어질듯이 내려갔다. 나는 내려갈 때도 애들보다 천천히. 거의 다 내려와서 찍은 마지막 사진이다. 갑작스러운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깜짝 등반 같은 느낌이 났었던. 그리고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압박해 오던 미래에 대한 중압감을 신체적인 압박으로 조금 해소할 수 있었던 하루.

  결과는 나와봐야 아는 것이고, 앞으로 어찌될는지 알 수 없지만, 함께 북한산을 올랐던 이 놈들의 미래와 내 앞날이 아무쪼록 거친 비탈만은 아니기를.


2011년 10월 26일. 북한산 백운대.


+ 구파발역에서 내려서 704번이나 34번 버스를 타면 북한산 국립공원 입구까지 간다.

+ 포스트 써 놓았다가 이제서야 업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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