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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설] 전갈 - 김원일

by 오후 세 시 2008. 6. 28.
전갈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김원일 (실천문학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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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 B+

  김원일이라는 작가를 처음 만났을 때가 기억난다. 인제 만해 마을에서 작가 초청회를 하던 때였는데, 김원일 작가가 온다고 해서 부러 찾아갔었더랬다. 새하얀 머리칼, 깊게 패인 주름, 절뚝거리시는 발걸음, 생각보다 몸도 불편해 보이시고 얼굴에도 세월의 흔적이 많이 보여서 작가 초청회에서 말씀은 제대로 하실 수 있을까 조심스런 걱정도 했었다.

  그런데 웬 걸. 장장 세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열강을 하셔서 깜짝 놀랐다. 중간중간 마른 입을 축이시느라 물잔을 드실 때 빼고는 거침없는 입담으로 문학 이야기를 하시는데, 세 시간 동안 그 분 말씀에 온전히 몰입했었더랬다. 겉으로 보여지던 모습과는 달리 작가의 목소리에선 어찌나 힘이 느껴지던지……. 눈빛은 날카롭다 못해 매섭기가지 했다. 평소 사진을 통해 만나보던 맑은 웃음의 김원일은 없고 소설 이야기 하나에 온갖 열정을 다 쏟아붓고 있는, 카리스마 넘치고 꼿꼿한, 작가 김원일이 거기 있었다.

  『전갈』은 그의 2007년도 작품이다. 내가 인제 만해 마을에 김원일 작가를 만나러 가기 위해 그의 작품들을 섭렵하던 것이 2004년이었으니까 3년이 지나고 난 다음에야 그의 새로운 작품을 다시 알게 된 셈이 됐다. 노장이신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작품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는 그를 보면 김원일은 정말 영락없는 작가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금년에도 『오마니별』이라는 장편을 또 펴냈다고 한다. 그의 창작 욕구가 얼마나 커다란지 알 수 있을 듯하다.

오마니별: 김원일 소설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김원일 (강,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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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갈』을 읽은 지 1년 만에 다시 손에 쥐었다. 소설은 읽을 때마다 항상 새로운 감흥을 준다. 책을 두세 번 읽을 때, 새로운 정보를 발견하는 것과는 또 다른 매력이 소설에는 있는 것 같다. 소설은 모든 정보를 알고 있어도 다시 읽으면 새로운 감흥을 주는 신비한 힘을 지니고 있다.

  1년 전에는 소설의 등장인물을 시대와 관계 지으면서 읽었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 한국 전쟁이 나던 시기. 한국 전쟁 종전 후 6,70년대의 산업화 시기, 그리고 현대. 중요하게 다뤄져야 하는 몇몇 역사적 사건들이 빠져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100년 역사를 세 등장인물을 통해 비교적 세세하게 투영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매우 재미있게 읽었었다. 삼대에 걸친 한 가족, 즉 할아버지와 아버지, 아들을 시대의 상징으로 내세우고 있다는 점도 정말 흥미로웠다.

  이번에 읽으면서 작가의 필체와 필력에 감명 받았다. 기성 작가(중견 작가들을 일컬음)와 젊은 작가의 차이는 아무래도 필체와 필력에서 오지 않나, 그런 생각을 가끔 한다. 기성 작가의 필력에는 젊은 작가가 따라오기 힘들고, 반면 젊은 작가의 필체에는 기성 작가가 따라오기 힘들지 않은가, 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필력이란 글을 끝까지 쥐고 가는 힘이다. 경험이 부족한 젊은 작가들에게는 이 필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지사. 기성 작가들은 글을 밀고 나가는 힘이 젊은 작가들에 비해 월등히 뛰어나다. 물론 몇몇 젋은 작가들은 특출난 필력을 지니고 있기도 하지만. 어쨌든 보편적으로 봤을 땐, 기성 작가들의 필력에 젋은 작가들이 따라오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필체라는 것은 글을 쓰는 스타일이다. 기성 작가들에게도 스타일은 당연히 있다. 우리가 어떤 글을 읽고, '이건 누구의 글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작가에게 글 쓰는 스타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성 작가들의 스타일은 요즘 시대에 먹히기 힘든 점이 분명히 있다. 독자의 스타일이 달라졌고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젊은 작가들은 생각이 없다, 사유가 부족하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사실 그건 젊은 작가들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특징이 그러한 것이다. 오래 생각하지 않고 자극적으로 즐길 수 있는 스타일이 기존의 주류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주류로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급변하는 현 시대를 그려내는 젊은 작가들은 그런 면에서 양가적이다. 기존의 시대를 거부하기에 리스크를 지니고 있는 반면, 현존하는 시대를 받아들이기에 현재적 가치를 담지할 수 있으므로. 어쨌든 그런 면에서, 기성 작가들이 이 시대의 스타일에 맞는 글을 써 내기가 쉽지 않다는 것만은 자명하다. 따라서 그건 젊은 작가와 기성 작가를 구분짓는 하나의 특징이 될 수도 있겠다.

  이번에 『전갈』을 다시 읽어내려가며 느낀 것은 역시 필력이 대단하다는 것이었다. 『전갈』이 장편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더더욱 그러하다. 더군다나 문학계에 입문한 이후 한결같은 주제로 소설을 써 오고 있다는 점도 그의 필력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증명해 준다.

  그런데 그의 필체. 그것에도 감탄했다. 1년 전 『전갈』을 술술 읽어내려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필체가 현 시대를 아우를 수 있을 만큼 자연스러웠기 때문인 듯하다. 역사란 어쩌면 지리멸렬하게 펼쳐질 수도 있는 것인데 김원일은 그걸 자연스럽게 현 시대와 교차시키며 녹여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지닌 스타일, 즉 필체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중 가장 돋보였던 것은 글에 영상이 묻어나온다는 점이었다. 『전갈』을 읽는 내내 한 편의 영상물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요즘 젊은 작가들이 그것 때문에 많은 비난을 받기도 한다. 글이냐? 영화냐? 드라마냐? 이게 소설이기는 한 것이냐? 따위의. 사실 이런 필체를 기성 작가들이 보여준다는 것은 다소 힘들 수 있는 것인데, 김원일은 그 부분을 완벽하게 소화해 내고 있었다.

  그가 여전히 소설을 쓰고 있고, 글을 써내는 힘과 글을 써내는 스타일을 고루 겸비하고 있다는 사실은 독자를 행복하게 한다. 다음 해엔 또 어떤 소설을 들고 독자들과 조우할까? 이런 행복한 상상을 하게 만드는 작가, 김원일. 그는 늘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만든다.

  책 관련 내용은 작년에 감상문 써 내면서 모두 낸 탓에 이번 포스트에는 책에 관련된 별 내용이 없다. 아래 관련 기사를 통해 해갈!!


내 몸에 흐르는 '나쁜 피'의 기원, 한겨레, 최재봉 기자, 2007 (03. 15)

맹독처럼 치밀한 三代소설 '전갈', 뉴시스, 신동립 기자, 2007 (03. 15)

<인터뷰> 신작 장편 '전갈' 낸 김원일씨, 연합뉴스, 김정선 기자, 2007 (03. 16)

장편 '전갈' 내놓은 김원일씨 "현대사 속 선악 다 가릴 수 있나", 동아일보, 김지영 기자, 2007 (03. 17)

김원일 신작 '전갈'… 인간은 자신을 찌르는 독침 하나를 달고 사나니, 국민일보, 정철훈 기자, 2007 (03. 18)

장편소설 '전갈' 낸 김원일씨... '지독한 3대' 그려, 경향뉴스, 이상훈 기자, 2007 (03. 18)

격랑의 현대사, 민초들의 비극, 문화일보, 장재선 기자, 2007 (03. 19)

김원일 새 장편소설 '전갈', 한국일보, 장병욱 기자, 2007 (03. 19)